
●朴錫浩 展 1996. 4. 12 - 5. 1
●예술의 전당 미술관 제1,2 전시실
●우울한 시대가 머무는 港口
●蒙 弘 基 (미술평론가, 예술의전당 미술관 큐레이터)
1 . 성장과정과 화도입문
寒園 朴錫浩는 1919년 7월 19일(음력) 충북 옥천의 한 초가집에서 아버지 朴章款과 어머니 周鳳月의 2남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상에는 1919년생으로 되어 있고 이후 출판된 작가 연보에는 모두 1921년생으로 되어 있다.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樹話 金煥基가 미국에 있을 때 朴錫浩를 록펠러 재단에 소개하려고 하였고 이때 미국에서 나이가 많으면 불리하다고 하여 두 살을 줄이게 되었다고 한다.
朴錫浩의 초기 기록은 찾기 힘들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졸업하기 이전의 학적이나 생활상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버지인 朴章款은 4대 독자로서 손이 귀한 집안이었고 전통적인 선비로서의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았다. 이는 생활의 궁핍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朴錫浩의 선비적 기풍에 유전적으로 흘러들어 간듯하다. 두 형제중의 맏형인 박병호도 사망하고 朴錫浩의 어린 시절을 증언 해 줄 친척은 만날 수가 없는 셈이다. 유일하게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충북 이원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경북 김천에서 중고등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부친이 대를 이어 살던 곳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이다. 어머니가 옥천에 계시면서 朴錫浩를 낳았고 이원에서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서 약국이라는 한약방 주인에게 한문의 기초를 배웠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적 선비가문의 가정교육과 일제하의 학교교육이 朴錫浩의 유년시절의 교육적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과 같은 기억은 어린시절 부터 늘 따라 다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올라와 관동(지금의 영천)에서 하숙을 하며 살았고 1944년 친구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부인인 金建泰와 결혼을 한다 이들 부부는 관동의 셋방에서 신혼을 시작한다.
寒園 朴錫浩가 초기에 그림을 어떻게 배워 나갔는지에 대하여 소상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단지 부인 증언에 의하면 1944년 결혼 당시에도 신촌에 있던 鐵馬 金重業의 화실에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朴錫浩의 화풍이 구상주의로 일관한다는 점과 鐵馬 金重業의 화풍이 향토적 자연주의를 근간으로 한다고 할 때 아마도 학습기에는 鐵馬의 향토적 자연주의풍을 익혀 나갔으리라고 추정된다. 이런 그가 '현대적 조형공간의 창조' 라는 새로운 미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48년 南寬의 화실에서 수업을 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南寬은 1935년 동경 태평양 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구마오카(熊問) 미술연구소에서 실습조교를 지내면서 일본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흡수하였고 1954년 도불하기 이전에 이미 추상화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1954년 9월 미도파화랑에서 개최된 南寬의 도불 작품전에는 도불 이전의 南寬 작품을 결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이미 현대적인 조형공간의 창조'라는 명제가 중심적 테마로 부각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이후 朴錫浩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일제하 양화교육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해방이 될 때 까지 정규미술학교조차 없었다. 1910년대 동경에 유학한 高養東, 金觀鎬, 金覆永, 李鍾禹등 東京美術學校의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들이 귀국하면서 초기의 화단이 형성된다. 당시 동경유학은 東京美術學校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 東京美術學校의 교육과정은 구로다 세이끼 (黑田淸輝 1866-1924)의 영향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로다는 1884년 도불하여 라파엘 콜린(Raphael Collin 1850-1916)에게서 회화를 배운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알사스-로렌지방을 빼앗기고 안으로는 일시적으로 코뮌정부가 수립되는 등 정치적 분열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는 중산층에게 전통적 가치의 상실에 대한 극도의 불안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상주의도 사회적 긴장감이 해이해지고 극도의 보수안정 심리에 영향을 받아 점차 아카데미즘으로의 회귀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콜린은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여 당시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에 인상파적 요소를 절충한 화법으로 이름을 얻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와 같은 절충화법을 익히고 귀국하였고 새로운 화법에 대한 학생들의 열화같은 성원은 관료체제의 벽을 허물고 1896년부터는 東京美術學校의 정규과정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1907년에는 文展(일본 文部省 미술전람회)을 개최하기에 이르른다. 한국의 서양화단의 주류를 형성하던 鮮展 중심의 아카데미즘도 바로 이러한 일본 外光派의 절충화법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고 이로부터 '현대적 조형공간'으로의 이행은 金賤基, 柳永國, 南寬 등 추상미술의 선구자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행의 경로였던 것이다.
여기에 서구의 계기적인 발전과는 다른 한국 현대미술사의 시대배경이 있다면 한국의 '현대적 조형공간' 에는 차라리 단절하고 싶은 현실에의 기억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고 이는 식민지 현실의 자괴감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해방이 되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기쁨보다는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에 의해 어둡게 채색되어 질 때 이들에게 순수한 현대 조형 공간의 창출이야말로 새로운 해방의 탈출구가 되었던 것이다. 金錫告의 작가의 개성적 내면을 통하여 창조된 현대적 조형공간의 의미도 이와 같은 연유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鐵馬와 南寬의 화실을 두루 출입하던 이 시절 드디어 학습기의 모습을 벗고 자신의 개성을 '순수 조형 공간'에 담아내는 작가로서의 길을 시작하였다.
1946년 28세 때에 앙뎅팡당 미술협회전에 유화 2점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협회장상을 수상한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방이후 생계를 위하여 시작해 보았던 가죽염색공장이 실패로 끝나고 근근히 이어가 야했던 생활고 속에서 1949년에는 PX에 출입하는 동네부인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 납품하는 크리스머스 카드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여건 속에서는 일약 횡재에 달하는 호황을 맞이했다. 이 호황에 박석호의 그림실력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 덕택으로 마포 신공덕동에 집을 샀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 해에 홍익대학교에 처음으로 생긴 미술학부에 제 1회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학창생활은 6.25로 인하여 잠시 중단된다.
박석호는 고향인 이원 황골의 고모집으로 단신으로 피난을 나갔다가 부산으로 옮긴 학교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 자취생활을 한다. 1953년 홍익대 미술학부를 졸업하면서 동시에 학교 조교로 남는다. 이 시기 학교에서 만난 樹話 金煥基에게 朴錫告는 깊은 인간적 감화를 받는다. 그 후에도 寒圍은 '인간은 樹話에게 배웠다' 는 말을 하곤 하였다. 金煥基는 朴錫浩가 너무 착하니 차게 좀 살라고 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준다. 樹話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분은 계속되었다. 1954년 학교가 서울로 이사를 오자 원래의 근거지인 신공덕동으로 돌아온다. 이때서야 전가족이 모두 모인다. 피난지에서 얻은 둘째아들 내섭, 큰아들 내성 , 그리고 부인과 어머니였다. 1955년에는 좀더 넓은 집을 찾아 처가 식구들이 모여 있던 대방동의 적산가옥을 구입하여 이사를 한다.
2. 초기작품의 세계
1956년 8월 新人會의 창립회원이 되어 창립전에 작품 5점을 출품한다 新人會展은 57년에 한 번 더 개최되고 단명으로 그친 듯하다. 이 시기를 박석호 회화 세계의 제 1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작품과 자료가 지극히 부족하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이른 작품인 1959년의 (女人) 과 1960년의 (山) (도판 참조)을 통하여 이 시기 작품 경향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초기의 작품은 강한 내면적 표현의지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서술적 내용이나 객관적인 대상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山) 은 풀도 나무도 없는 산, 언덕도 계곡도 없는 산이다. 색채의 감각과 형태의 조형감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강하게 솟아오르는 의지 그대로만을 드러낸 채 거대화면을 지탱해 내고 있다. 뿜어 나오는 활화산의 기운처럼 흐르는 붓터치는 형상을 그려낸다기 보다는 내부에서 솟구치는 생명의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나마의 골격도 이지러지는 부분을 만들어 낸다. 1950년대는 황량한 것이었다 도시도 들판도 황량해야만 했다.
그리고 황량한 들판에 쓰러져 있을 수만도 없었다. 여기에 朴錫浩의 (山) 이 존재한다. 순수한 조형공간만이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자기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의 (女人) 은 이미 미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의 형태나 색채는 남아 있는 구석이 없다. 검붉은 흙빛으로 채색한 살결은 생명의 덩어리가 있다는 것만을 느끼게 해 준다. 다듬어지지 않고 다듬을 필요도 없이 분출하고 있는 표현만이 이 생명을 지탱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 표현일 뿐이고 생명력의 자기 확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살고 있는 1950년대의 존재 상황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1959년 대방동집 앞에서 뛰어 놀던 둘째 아들이 맨홀 저수지에서 익사하는 불운이 겹친다. 이 사건으로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내적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안팎으로 황당한 시대적 정경 속에서 추상으로 곧 흘러들어 갈 것 같은 朴錫浩의 초기 시대는 1962년 新象會와 1963년 具象展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던 듯 하다.
마네 이래로 회화에 있어서 평면성의 해결(주3)은 현대 미술의 가장 큰 과제였다. 숭고한 주제도, 아름다운 대상도, 사실적 재현도 결국 평면 위에서 작가에게 관찰되어진 색채에 의해 채색될 뿐이라는 작가의식의 발견은 마네를 현대회화의 선구자가 되게 하였고 평면 위에 어떻게 대상의 실재성을 담아낼 것인가하는 과제는 후기 인상파에게 계속 이어지는 과제가 된다. 반 고호는 인간의 내면적 생명력의 표현을 통하여 이 평면위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고 세잔느는 자연대상의 구조적인 요소들을 색면으로 쌓아 가고자 했다.
고갱은 자율적 힘을 얻게된 색과 형태를 종합하여 원시세계의 충만한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대로는 가능성이 없겠다는 자기인식은 회화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문명을 지탱해온 기계론적 물질관에 근거한 낙관적 발전사관이 다다른 궁극적 반인간 성이 제기한 예술적 과제였다. 朴錫浩도 이와 같은 '평면성'의 과제에 집착한 현대작가로 출발하였다. 그는 일찌기 1950년대부터 화면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은 화면으로의 평면성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생명의지였다 이 앙상한 근골로만 남아 있는 생명의지는 그대로 그의 시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남긴 것은 선의 구성적 표면이 아니라 생명의지만이 버티고 서있는 황량한 삶의 풍경이고 그가 살아갔던 1950. 그의 시대를 그려내는데 반고호는 단지 안내자일 뿐이었다.
3. 至高至純의 세계를 찾아서
60년대 홍익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좀 더 정제된 화면이 등장한다 그의 (鄕) (도판참조) 이라는 작품을 보자. 떠오르는 태양이 있고 말들이 어디론가 달리고 어린아이가 발가벗고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단지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마치 처음 대지에 빛을 발하는 始原의 분위기를 만들고 말들은 목적도 없이 그저 달리는 그 자체의 운동감만을 보인다. 어린아이는 발가벗고 있다. 옷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없었던 모습이다. 그의 지고 지순의 세계는 이렇게 열린다. 구체적 현실이기보다는 문명이전의 원초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
또한 그 표현도 굳게 응축하여 안으로 안으로 견고하게 자기를 닫는 절제된 질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터운 마티에르가 화강석의 질감을 창출하는 이와 같은 형식은 朴壽根과의 깊은 내적 공감대를 확인시키고 있다. 말과 소년의 테마, 화감석의 질감은 60년대 朴錫浩가 안착한 세계였다. 1965년 (木馬와 少年 ), 1967년의 (東) (도판참조)과 關년의 (神話)도 이런 계통의 작품들이다. 朴錫浩의 또 다른 소재 하나는 불교적 테마였다. (東)에는 삼존불의 형상이 마치 풍우에 깎인 듯 하여 형체도 알 수 없는 듯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寒園이 불교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남다른 친화감은 그 이후의 작품에도 늘 변하지 않는 관심으로 같이 한다. 특히 홍익대학교를 사직하고 떠났던 석굴암, 분황사터의 뎃상 여행은 73년의 박석호 뎃상전(1973. 3. 26 - 4. 5)으로 결실을 맺었다.
후일 제자였던 신영옥은 이렇게 증언한다. "朴錫浩 선생님이 학교를 사직하시고 생활은 극도로 어려우셨어요. 좋은 종이를 구하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제가 그때 인연이 닿아 영국제 종이와 목탄을 가져 다 드릴 수 있었어요. 선생님은 그것으로 열심히 뎃상을 하셨고 전시회까지 개최하셨죠. 그때 홍익대학교 南寬선생님은 세계적인 뎃상전이 열리고 있으니 꼭 보라고 학생들에게 권유하였지요." 불교적 테마는 그 이후에도 (百淸여인 1971)과 (慈悲 1976)와 같은 手持佛을 그린 그림과 (受難 1987)과 같은 탑상을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朴錫浩의 불상은 원숙기의 원만구족형보다는 고졸한 삼국시대 초기적 형상을 띄우고 있다. 그의 탑상도 빼어난 형식을 갖춘 것보다는 마모되고 망각의 기억 저편에 버려진 모습을 다시 일으켜 세운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慈悲와 受難이라는 함의적 제목을 붙이고 있다. 불상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73년의 뎃상전에 출품된 (석굴암 본존) (금강 역사) (문수보살상) (사천왕상) 등의 연필, 콘테로 그려진 뎃상들이다.
寒園의 뎃상은 감성의 가장 깊은 포옹력 속에서 오랜 시간을 통해 닦아내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생성의 깊이와 개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설정된 천년 침묵의 석불들은 말 그대로 역사의 얼과 교감하여 오늘에 재창조된 살아있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맥도 모르는 채 그려내는 아그리빠, 줄리앙의 맹목적인 석고상 모사풍토와 그 지겨운 모사의 훈련을 거부하고 방종한 형식의 자유를 창조와 동일시하는 잘못된 미술교육의 경향을 질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지침으로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홍익대학교 교수시절은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도 회복하였던 것 같고 작품도 귀소적인 정감을 추구하는 관념적 경향으로 흐른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 귀의처는 소년, 말, 불상이나 신화와 같은 관념적인 테마였고 회백색의 응축된 표면으로 흡수되어 그의 정신적 구심이 '조형' 이라는 화두를 맴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회백색, 또는 청회색의 질감표현은 1972년 (群B )까지 계속되다가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이유를 '감정의 제약이 심해서'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주4) 이와 같은 화두를 깨치고 나아간 것은 재야작가로 본격적으로 발을 딛은 이후이다. 4. 분출하는 서민 생활의 체험 1966년 부당한 인사행정에 항의하여 동료교수 5인과 함께 홍익대학교를 사직한 후의 생활은 양계를 통하여 이어가는 등 극도로 어려운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활은 그의 화폭위에 '서민의 등장'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다. 1970년대를 힙겹게 살아야 했던 그의 작품의 귀결은 1977년 제 5회 개인전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 市場을 위주로 그렸던 이 시기로부터 서민의 생활모습이 등장하고 안으로 응축된 화강석 질감으로부터 감각의 활기를 찾는다. 이와 같은 필치는 朴錫洛만의 내면적 운율에 의하여 조율되어진 것이었고 이는 서민들의 실제 생활의 치열함이 그의 내면 속에 밀도를 더해감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歸路 1977) (도판참조)에는 방금 들어오는 파닥거리는 어물을 놓고 후끈 달아오른 물가 아낙네들의 거친 호흡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날의 어물을 바구니에 이고서 돌아서는 고단한 그러나 의연하게 걸어가야 하는 물가 아낙네의 행렬, 그것은 바로 서민 생활의 현장이자 소리 없이 세상을 지탱하는 민중적 삶의 실체 그 자체이다. 그의 (夜市場 1979) 에서도 어둠 속에서 얼굴을 잃어버린 삶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는 그 이후 80년대에 등장하는 민중미술의 정치적 목적의식과는 다르게 생활 속에서 꿈틀거리는 서민들의 생활세계 그 자체를 체험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비록 구체적인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드러낼 필요가 없었어도 생활의 굴레를 힘겹게 밀고 또 밀어가야 했던 70년대 이 땅의 서민적 풍상과 의연한 호흡을 내면적으로 체질화하여 생활 속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필연적 귀결로서 』朴錫浩의 회화세계가 창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흐린날 1977) (도판참조)에는 햇빛을 가리운 무거운 먹구름이 사람들의 일상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고 앞도 옆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버티고 있는 것인지 비바람에 곧추서서 안간힘을 쓰는 듯한 인물의 군상이 등장한다. 이것은 70년대 군사정부의 암울한 풍파를 견디고 살아가는 이 땅의 서민적 끈기와 체취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서민생활의 체험적 공감으로 서민감정을 길어 올려 실재 생활 그 자체를 생동적으로 그려내었고 이는 어둑어둑한 한 시대의 표상이 되었다. 우리 주변의 객관적인 대상세계를 화폭 위에 어떻게 실재의 세계로 담아낼 수 있는가하는 일은 서양 근대미술의 과제였다.
르네상스 이래로 전개되었던 원근법 속에 자리잡은 형태로서의 물체를 인상주의가 제기한 빛의 색감으로 구축적으로 그려 나감으로써 현대미술의 한 전형을 이루게 된 세잔느의 방법은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적 시각에 의하여 깨어져 나간다. 입체파는 고전적 형태감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 요소들을 분할하여 대상의 회화적 본질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입체파는 세잔느에게서 이룩된 구축적 회화를 더욱 본질적인 요소를 향하여 탐구해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태적 문제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 다면적인 시점이 도입되고 동적인 화면을 통하여 시간적 개념을 그려낸다 하여도 순수한 시각적 차원에서의 형태를 파악하는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미술이 안고 있는 미궁의 혼란은 3차원적인 생활실재와 2차원적 회화표면의 이원적 분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내면적 표현의 충동자체 속으로 침잠하는 추상주의와 실재의 본질적 요소로의 환원으로 돌아가는 입체주의는 미래파, 구성주의 등의 또 다른 방법적 시도를 예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無로 돌리는 다다로 귀착되고 최소한의 표현, 표현자체의 부정에 이르기까지 막다른 골목의 몸부림은 처절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안스러운 상황 속에서 손쉬운 안락감으로 달콤하게 유혹하는 것이 존재상황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엇으로부터의 추상인지를 잃어버린 추상표현주의, 색면 그 자체의 조형감의 유희 , 팝아트와 같은 대중적 기호에의 영합, 그리고 문제의 식 자체를 잃어버린 다양한 혼재의 긍정이 다원성과 창조의 자유를 표방하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깃발아래 모여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寒園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 라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실재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당대에 공감을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간 서민의 삶과 그 삶이 만들어내는 실재의 감정을 회화적 대상으로 담아내고 자했다. 세잔느에게 문제가 된 3차원적 실재는 인간의 사회관계와 생활이 배제된 회화 적 대상으로서의 시각적 존재일 뿐이었으나 寒園 朴錫浩에게는 함께 공감을 나누는 삶 그 자체가 실재였던 것이다. 이를 담아내는 방법은 체험적 공감을 통하여 실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2차원이냐 3차원이냐 하는 형상적 측면이 극복되고 4차원적 시간 개념도 제기될 필요가 없는 새로운 회화사적 지평이었고 생활하는 서민들의 삶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지평은 회화적 방법의 문제에 집착하는 서구미술의 한계를 성큼 뛰어넘은 것으로서 방법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서민적 생활체험 의 필연적 귀결로 이루어진 작화세계였다. 서구미술의 형식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寒園의 정신적인 심층은 루오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한원은 좋아하는 작가가 루오라고 말했다.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현상에 대하여 본능적인 혐오를 창녀, 부패한 관리, 어릿광대의 상징적 주제로서 표현하였으며 색채로 드러나는 객관적 대상성 보다는 흑색을 기조로 고발적인 정신적 내면을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朴錫浩가 남기고자 했던 1970년대의 서민의 표상에는 루오처럼 격렬한 내면의 격동도 밀레와 같은 애잔한 낭만적 감상도 배제된 것이었다. 그의 서민은 우울하되 좌절하지 않고 고통스럽되 감상적 해소에 빠지지 않는 튼튼한 생활인으로의 서민이었다 따라서 그의 화면의 감성적 필치는 요동치기보다는 안정되어 있고 미온하기보다는 힘찬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것은 어두운 터널같은 시대의 질곡을 온 힘으로 버티어가는 1970년대의 서민의 표상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한 시대의 서민적 삶의 체험을 내면화하고 이 내면세계를 진솔하게 추구해간 작품이 개인의 자의식을 넘어 시대의 표상으로 남게 되는 경로가 있다. 그리고 진부한 일상성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지 못했고, 또 벗어나고자 하지 않았으면서도 우리의 일상을 시대의 증언으로 승화시킨 』維點告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朴壽根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서민생활의 긍정과 인간과 인간간의 유대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5. 현대미술의 넓이와 寒園의 깊이
이와 같은 작품세계가 회화적 절정을 이루는 것은 1981년 배전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7번째 개인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배전은 朴錫浩를 한마디의 상징으로 '배의 작가'로 귀결시킨다. 방법적 사유나 개인적 충동이 아니라 생활의 필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작화태도를 견지하였기에 그의 회화적 방법은 다양한 변화보다는 생활세계의 깊이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가 80년대에 도달하여 그 이후에 전개되는 배와 항구의 세계에 주목하여 보자.
(漁港1980) (港 1981) (晩1983) (漁材 1983) (希望 1984) (浦口 1986) 등 (도판참조)으로 전개되는 배의 세계는 비릿한 항구의 체취를 담고 살아가는 고달픈 삶의 상징이자 또한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생활의 질곡 속에서 생활을 벗어나고자 했던 서민적 애환의 끝에서 터득되어지는 심원한 예술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독자적인 '朴錫浩식 마티에르'는 농익은 원숙기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양하게 찾아나섰던 회화적 실험들과 폭넓은 회화 방법의 진폭을 朴錫浩는 외면하였다.
그리고 오직 서민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삶 그 자체를 담아내는 집념의 길을 고집하였다 이는 생활세계와 작화방법의 이원적 분리위에서 구속을 가져올 뿐인 작화의 형식을 끝없이 부정하고 파괴하는 피카소의 개별적 자아로서의 자유스러움과 인간과 인간의 공감적 유대로 형성된 생활세계와 작화방법을 일원적인 실재로서 추구해 가는 』暇點告의 공동체적 자아사이의 본질적 차이에 기인한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이나 형식의 창조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객관적인 대상이나 일상의 묘사도 아니었다.
일상세계를 통해 형성된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 대상에 담아 끝없이 이어지는 생성론적인 창조의 세계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피카소 등에게서 영원한 모더니즘 미술과 박석호의 근원적인 태도의 차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현대회화의 다양함과 진폭은 다양한 창조성의 이면에 안착되지 못한 모색과 지향을 잃어버린 개별성의 동요를 반영한다. 그러나 담을 것이 분명하고 꼭 담아내야 할 지향이 있었던 사람에게 다양함은 이색적 호기심일 뿐이다. 여기에 寒園의 외길의 깊이가 지니는 위대함이 있다.
70년대의 긴 터널 같은 시기를 지나 80년대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잠깐의 민주화 열기에 영향을 받아 화단도 개혁의 진통을 겪는다. 재야에 은둔하다시피 하던 寒園이 이때 개혁의 선봉으로 나서고 미술협회 임원진이 재구성되기에 이른다. 국전이 대한민국 미술대전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고 평생에 가까이 하지 않았던 미술대전 심사위원(양화 분과 심사위원장)에 피임된다. 그는 작가적 헌신이외에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홍익대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이 때 한 번 이외에는 화단에 직함을 지니지 않는다. 1982년 단 한 번이었다. 그리고 83년의 제 8회 개인전 브러셔의 첫 장은 그의 (希望)이라는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 작품에서 錫告는 색채와 빛을 되찾는다. 태양 아래에 반짝이는 역동과 활기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깊은 내면의 지층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원색으로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 빛은 잠시 들어온 광명 이상의 변화는 주지 못한다. 생애 마지막이 되고 마는 이 전시에 깔려 있는 중후한 어두움에 대하여 한 신문기자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나의 그림은 좀 어두운 편입니다 어두운 항구나廢船, 부두의 船橋와 을씨년스러운 마스트들의 윤곽을 즐겨 다루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두의 밤 풍경이나 새벽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예요. 또 바다나 항구라는 소재를 특별히 좋아해서 일부러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暇默告 그림의 어두움은 새벽도, 밤도, 비오는 날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그리기 마련이니까 그 어두움이란 사회상의 반영일 수도 있다고 했다.」 92년 4월의 어느날 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기 시작하여 생긴 통증은 협심증으로 진단되고 서울 중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수술 중에 위암 4기의 진단을 받는다. 앞으로 60일을 더 살지 못하리라는 의사의 선고를 기억하면서 朴錫浩는 1년 반의 투병생활을 한다. 투병 중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투병기의 작품은 쇠약해진 활동력을 반영하는 듯 새로운 테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늘 즐겨 그렸던 항구와 바다와 갯펄 등 과거 숱하게 그렸던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반추하듯이 소품들을 그렸다. (寒村 1993) (도판참조)에는 어디로 떠나려는지 배 한 척이 흐린 노을의 저편으로 뱃머리를 향하고있다. 배를 떠나보내는 마을에는 어딘지 모르는 정적이 감돈다. 그것을 작가는 차가운 마을(寒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떠나는 것과 남는 것들, 작가는 조금씩 별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砂上 1993) (도판참조)에는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리고 난 후의 모래벌과 태고 그대로의 바다가 출렁인다. 작가는 떠나고 난 뒤에 남은 것을 이 작품에 담았다. 작가는 이미 생명이 끝난 이후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 할 일이 더 있다는 아쉬움을 담고서 1993년 8월 남은 작품들에 모두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이후 그림은 더 그리지를 못 하였다. 그의 치열한 작가적 삶은 5월 20일 오후 차라리 아편이라도 먹어서 고통을 삭이기를 원하며 자택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80년대 말엽부터 다정한 친구가 되었던 화가 박상기, 부인, 작은며느리, 딸 그리고 때 마침 병문안을 온 화가 김종복이 임종을 보았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북한산 비봉자락에 뿌려졌다. 1967년부터 27년간 작업을 해 온 역촌동의 화실에는 (기다리는 사람들 1993) 이 남아 있었다.
6.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가 朴錫浩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것은 서민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실재적 감정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이었다 어떤 생활상의 외도도 걷지 않았고 또한 화면상의 어떠한 방법론적 호기심에도 끌리지 않고 오직 한 길을 걸어간 이유는 일관된 내면적 진실의 개안만이 굴레일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이 굴레를 벗어나게 하리라는 고집스러움 때문이었다. 따라서 寒園의 테마는 산과 바다, 서민의 일상 등 일상적 진부함으로 쉽게 간과하는 것이지만 서민의 시각으로 실제로 마주 대하는 대상으로서의 일상에 한 시대의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진부한 일상을 넘어서 자기 시대의 표상으로 남겨진 것이다.
이를 4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여 보면 1950년대에는 황량한 풍경을 오직 내적 의지로 지탱하는 표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고 1965년경부터 다소 온화해지고 관념적인 궁극적인 귀의처에 대한 동경이 견고한 화강석의 질감으로 나타난다. 1973년부터는 서민들의 생활의 힘겨움과 굳굳함을 내면의 체험적 공감대에서 분출하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감각적 필치와 일치시키고 있다. 1980년대에 전개되는 후기작에는 개성적 필치가 깊이를 더하여 독특한 '朴錫浩식 마티에르'를 창출한다.
여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체험의 세계를 진솔하게 추구해나갈 때 그것이 시대의 증언으로서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게 하는 회화적 방법론이 있다. 이와 같은 회화적 방법론은 朴錫浩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지평으로 열려져 있다. 오직 방법의 문제에만 집착하여 회화의 본질이 전도되는 소위 모더니즘 미학으로부터 자기가 살아간 일상을 시대의 표상으로 담아내는 인간의 '체험적 진실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서구의 현대미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전통으로서의 '한국미술'을 열어 나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때의 '한국미술'은 단지 지역적 차이나 소박한 민속적 특징에 집착하는 소재주의가 아니라 객관과 주관과 예술을 이원적인 대립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일원적 실재로서 파악하는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재정립을 통하여 미술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회화가 봉착한 자기모순을 뛰어넘는 새로운 미술의 장을 말한다.
또한 80년대 이후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잡았던 민중미술이 부닥치고 있는 관념적 구호에 따르는 생경한 표현성과 소시민적 조급성이 야기한 민중적 공감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자기 재정립을 하는 데에도 주요한 시금석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고 평면성을 극복하는 방법론적 시도로서 90년대 이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설치미술을 비롯한 온갖 실험적 방법들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한국미술'은 서구적 근대화가 곧 식민지의 예속으로 귀결되어야 했던 한국의 근대사회에 내재된 이율배반적 모순으로부터 진정한 민족적 자아정체성을 회복해 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회화의 미적 기준은 끝없이 변해 왔다. 특히 오늘날은 가히 다양한 기준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를 만 하다. 전통적인 사실적 아카데미즘으로부터 참신한 조형 아이디어의 개발, 첨단의 테크놀로지 와 컴퓨터의 활용, 거기에 민중의 정치적 목적구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준이 자기 나름대로의 스펙트럼의 불빛을 발하고 있다. 역사에 있어서의 변화란 개인의 인생살이 속에서는 그 미동조차 느끼기 힘들도록 완만한 것이어서 개인이 접하면서 살고 있는 일상의 체감면적은 역사의 너무나 적은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조건 위에서 예술의 임무가 역사의 진행경로를 미리 다 알아버린 선각자가 민중에게 부여하는 당위적 所與라면 이는 구체적 조건 위에서의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의 소통의지에 역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무력감을 일찌감치 달관하여 자기만의 조형적 실험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이는 폐쇄적인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술적 감동이 관념이 아닌 실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구호적 주장의 당위성이나 남다른 형식만의 유희로 실재적인 예술적 감동이 대체될 수는 없다 여기에 투명하게 직시하는 눈으로 자신의 진솔한 경험적 일상과 그 감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여 동시대인의 공감을 획득하고 나아가 자기 시대의 보편적 표상을 남기는 회화의 본질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그래서 우리가 1950년대의 전후의 피폐한 시대를 무뚝뚝하게 견디는 서민의 단단함을 기록한 朴壽根을 어두운 창공 위의 별처럼 바라보는 것이라면 70,80년대라는 군사정부하의 우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朴錫浩'라는 별 하나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