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12년차, 안남에 뿌리내린 것이 행복하다
귀농 12년차, 안남에 뿌리내린 것이 행복하다
75살 농부 천윤기, 어머니학교 교사부터 로컬푸드생산자회 회장까지
인디언 감자, 돼지감자도 재배, 좋은 습관 만들고 성찰하는 삶 꿈꿔
국선도 꾸준히 하고, 단소 연습을 시작하다
  • 황민호 minho@okinews.com
  • 승인 2020.02.04 0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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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삶과 결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기존 생활에 지칠 때 다른 선택지를 찾아 떠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들이 늘 만만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삶터에서 극복하는 것 이상으로 그만큼의 ‘마찰음'과 ‘파열음'이 있기 마련이다. 나이들어 귀농하겠다고 불쑥 떠난 서천 장항이 그랬다. 바닷가 근처에 있으면 낭만도 있고 쉬엄쉬엄 농사도 지으며 살겠거니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준비 안 된 채 시작한 귀농은 세찬 바닷바람에 한번, 이웃들과 익숙하지 않은 관계 때문에 한번 ‘된서리’를 맞았다. 잠시잠깐 바닷바람 쐬는 것과 매일 일상으로 마주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1년 동안 호된 귀농경험교육을 거친 그는 다음 정착지로 옥천 안남면을 택했다. 예비교육을 혹독하게 받았던 탓일까. 아니면 둥글둥글한 옥천 안남 사람들의 심성 탓일까. 학촌에 뿌리내렸다가 마느실로 이사 온 것 까지 합하연 어언 11년째, 강산은 한번 변했다. 그의 뿌리는 더 단단해졌다. 나이들어 귀농한다는 것은 대부분 한껏 확장되었던 사회생활을 축소하고 조용히 사는 은둔형 귀농이 많다. 하지만, 천윤기(75)씨는 달랐다. 마치 안남 바닥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안남어머니학교 교사도 하고, 안남로컬푸드생산자협의회 회장까지 맡았다. 그 이전엔 배바우장터 추진위원장도 맡아서 주말 장터를 견인하는 작업까지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백발성성한 그가 노익장을 발휘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여전히 호기심이 많다. 남들 안 심는 새로운 작물을 심는 실험정신, 늘 무언가 새롭게 배우려는 열정은 그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다. 이제 5년, 그는 자립적으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나이를 80살로 설정하고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고 성찰하며 앞으로 5년의 삶을 설계할 거라고 말했다. 

안남면 화학리 돌고개 넘어가는 초입, 돌탑과 정자가 보이는 바로 왼편 집, 그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가 고향이다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에 살았다. 양평 지평막걸리가 그 쪽에서 생산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산 옆에 있는 원당으로 이사를 왔다. 누이와 형님이 한분씩 계셨고 내가 막내였다. 휘문중학교를 나왔는데 사실 고등학교까지 갈 형편이 아니었다. 1961년, 어떻게 진학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차에 신문을 보다가 군대 통신분과를 지원하면 통신고등학교 학비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대신 고등학교 졸업 후에 7년간 군복무를 해야 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동국무선고등학교(현 광운전자공고) 통신과를 졸업하고, 바로 논산훈련소로 갔다. 논산훈련소와 대전 통신학교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일등병을 달았다. 의정부 제2보충대를 거쳐서 연천군 전곡면으로 배치됐다. 또 다시 통신학교에서 6주 교육을 받고 하사를 달았다. 나는 반송장비를 다뤘다. 전화기를 쓰면 그것을 다시 암호화해서 다른데 보내는 작업이었다. 다시 자대를 배치 받았는데 강원도 원주 제 1통신단이었다. 1군 사령부 지원대대에서 교환병과에서 근무했다. 교환소대 내무반장으로 60명이 넘는 교환병을 통솔하며 24시간 전화체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임무였다. 그 뒤로도 부사관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체육하사관도 했다가 7년 만기 복무를 마치고 얼른 제대했다. 군 생활이 잘 맞지는 않았다. 

통신부사관으로 군생활을 마치고 취업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첫 직장은 ‘페어차일드'라는 미국계 반도체 회사였다. 당시 모토로라와 쌍벽을 이루는 회사였다. 오일파동의 여파로 1년 조금 넘게 있다가 명예퇴직으로 3개월치 급여를 받고 나왔다. 그리고 서울 영등포 구로공단의 조그만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커넥터라는 전기선을 연결하는 업체였는데 절연고무파이프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거기서 3년 동안 일하면서 생산부장까지 달았는데 내 사업을 하고 싶어서 78년도 나왔다. 나는 그렇게 영등포에서 ‘중앙기전’이란 회사를 창업했다. 카세트 라디오 만드는 업체에 커넥터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로 직원 40명 정도를 둘 정도로 성황이었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고 잘 되면 늘 고비가 있듯이 화재도 한번 났고, 당시 노동조합이 들불처럼 생기던 그 때 아이엠에프까지 겹치면서 파산하는 업체가 늘어났고 우리도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당시 기업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생소해했고 어떻게 대처할 지를 몰랐다. 하청업체로서 본청이 어려우면 단박에 영향이 왔다.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기 일수였고, 결국 회사를 접었다. 그 이후로도 10년 동안 서울생활을 했다. 우리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길에서 노점도 하고 별 거 다했다. 숨 좀 쉴만해지니까 시골 내려가서 살고 싶더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질러버렸다. 아내가 반대했지만, 완강한 고집으로 추진했고 서천 장항으로 덜컥 이사를 해버렸다. 귀농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온 것이다. 서천 장항의 집은 100미터만 걸어가면 바닷가였다. 나도 준비도 안 되었고 바닷사람들도 억세더라. 그 때 장인어른도 돌아가시고 여차저차하며 다른 곳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정착한 것이 안남이다. 

서천을 거쳐 옥천 안남에 정착했다

화학1리 학촌에 집을 지어 3년 살았다. 거긴 마을 깊숙이 언덕배기였고 마당이 없어 아쉬웠다. 그 곳을 팔고 마느실 식당에 전세를 살 요량으로 들어왔는데 아예 구입을 하게 됐다. 안남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보니 시골생활에 어느덧 적응이 된 것 같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그냥 불쑥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차근차근 준비를 못 했다뿐이지, 자연농법 책도 읽고 왔다. 그런데 현장에서 하려다보니 고충이 많더라. 이상만 가졌던 거지. 제초제 쓰지 않겠다고 유기농으로 해보겠다고 발버둥 쳐보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되나. 씨앗뿌리는 봄에만 신이 나고 그 다음부터 일이 힘들더라. 그런 시행착오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돼지감자도 처음에 많이 심었다. 한 300평 정도, 우리나라 당뇨인구가 늘어나면서 돼지감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거라는 뉴스를 보고 돼지감자를 심었다. 한 2년 열심히 홍보했더니 첫해 처음한 것 치고 제법 팔렸다. 그런데 건강식품도 유행을 타더라. 캐기도 힘들 뿐더러 기계로 해봐야 수확해서 모아둘 곳도 마땅찮아서 작물 재배량을 줄였다. 늘 새로운 작물 재배를 시도한다. 요즘에는 인디언감자라고 불리는 아피오스를 재배한다. 여기에 사포닌이 많이 들어가 있어 굳이 인삼 넣지 않아도 백숙 조리할 때 이거 넣으면 인삼 비스무리한 맛이 난다. 호기심이 있어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삼층파라는 것도 심어봤는데 파 꼭대기에 씨가 생겨 세번 자라더라. 솔직히 말하면 귀농해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농사 지으면 ‘농사 잘 짓네, 못 짓네’ 타박 듣는 것에 고연히 맘 상할까 봐 새로운 작물을 시도한 것도 있다. 어째튼 재미있다. 남들 안해본 작물을 하는 건 희소성도 있고 남들이 호기심도 가져서 좋다. 

안남어머니학교, 배바우장터, 로컬푸드생산자회도 참여했다

안남어머니학교는 한 3년 된 것 같다. 옥천살림 협동조합 행사가 있어 한번 갔는데 어머니학교 송윤섭 교장이 한번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권하더라.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수락했다. 나는 과목이란게 따로 있지 않고 다들 연세가 많으니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주일에 한 시간은 건강과 일반상식을 내 나름대로 준비하고, 다른 한 시간은 교재에서 일부 추려 선택해서 한다.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건강해져 노인들에게 자존감을 갖게 해주기 위함이다. 몸이 당장 불편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막상 팔자에도 없는 교사를 해보니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우는 것 같다. 건강과 상식에 대한 교재가 딱히 없다보니 뭘 할 지 일주일 내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서 준비한다. 배바우작은도서관도 그래서 많이 다닌다. 내가 잘 알아야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를 한다. 내 공부가 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배바우장터 운영위원도 좀 했다. 대표는 아니고 옆에서 도와주는 식으로. 안남면 모임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잘 되면 좋겠다 싶어 참여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에게 넘겨줬다. 장터를 활성화시키려면 안남면의 대표적 논의기구인 지역발전위원회에서 적극 결합해야 한다. 올해는 다른 것 안 맡고 돌아보려는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안남 로컬푸드 생산자회 회장을 덜컥 맡게 됐다. 지금 회원이 29명이다. 올 초에 회칙을 다시 만들고 배바우영농조합이랑 함께 가려고 한다. 회비 부담을 줄이고 문턱을 낮춰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순회수집할 수 있도록 이런 걸 적극 건의하려 한다. 

안남면에 사는 것이 참 행복하다

올해 안남에 들어온지 12년 째가 된다. 정도 많이 들어서 만일 이사를 한다 해도 안남 내에서 할 것 같다. 지금 집은 둘이 살기엔 너무 커서 관리하기가 힘들다. 식당이었던 자리라 건평이 51평인데 마당이 조그맣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200여 평 되는 대지에 20평 건물 정도에 마당을 원없이 이용하면서 살고 싶다. 요즘 내 밭은 서리태, 아피오스, 돼지감자, 마늘도 심었고 초석잠도 캐야 할 것이 있다. 아직 겨울이고 농한기이지만, 아피오스는 요즘에 캔다. 아피오스는 감자처럼 밥에 넣어서도 먹고 작은 건 장아찌로 만들어 먹고 용도가 제법 많다. 닦아서 거친 것만 제거하면 껍질채로 먹는다. 잘아서 콩감자라고도 한다.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로 인디언들이 저것을 주식으로 했단다. 올해 75세다. 1년 동안 쉬면서 내 생애를 돌아보려 한다. 60살때 시작한 국선도를 아침에 30분씩 꾸준히 하고 있다.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국선도에 이어 단소를 배우려고 단소 하나를 구입했다. 독학하려고 꾸준히 소리를 내고 있다. 페이스북은 정보화교육때 배운 인연으로 계속 매일 일기 쓰듯 하고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 소통하는 것이 나름 재미있다. 안남에 와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돌아보니 이뤄 놓은 게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습관 2~3개 더 생겼으면 좋겠고 지역적으로는 안남면이 주민들도 화합되고 행복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안남면은 둥그런 분지형이라 사람들이 자주 만나고 소통도 잘 된다. 안남에 온 것이, 옥천에 온 것이 내 일생에서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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