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문향] 읽지 않은 추모사

이흥주

2022-08-26     옥천닷컴

매화가 지지도 않았는데 벚꽃이 꽃잎도 내밀지 못했는데 어이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먼 산에 춘설이 타고 내려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보기도 아까워 눈을 감고 바라본 것이 엊그제인데…… 자네는 그때 정든 가족 뒤에 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이승의 마지막 열차를 타기 위해 어둡고 외로운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군. 얼마나 외로웠나. 아무도 동행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했을 친구를 생각하니 어찌 이리 가슴이 시려오는지 한겨울 삭풍을 가슴에 담는 기분일세. 부디 잘 가게. 그곳에 가서도 그리 술을 사랑하려는가. 하긴 우린 한동네서 같은 공기를 숨 쉬며 태어난 소꿉친구이자 술을 말로 먹던 친구가 아니었던가.

지난 가을 단짝친구들 다섯 명이 한 친구의 칠순 술을 마시러 대청호를 돌고 돌아 달디 단 소주잔에 파묻혔던 생각이 떠오르네. 그때만 해도 우리들은 자네가 그렇게 서둘러 떠날지는 생각도 못했다네. 그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네는 어찌 그리 서둘러 가야 했는가. 잘생긴 얼굴에, 잘 빠진 체격에 연예인을 해도 모자랄 멋진 모습이었던 자네를 이제 어디에서 보겠는가. 

한데 이 사람아, 내가 친구를 찾아가더라도 이제 같이 맞먹지는 말게. 오뉴월 하룻별이 어딘데 형님을 몰라보면 되겠는가. 한동네 동갑이지만 내가 생일이 다섯 달이나 빠르지 아니한가. 다섯 달 차이로 세상에 나온 친구와 나는 아름다운 금강과 순백의 모래밭에서 물오리처럼 물장구치며 컸지. 아마 우리들은 아름다운 금강 맑은 물처럼 너무도 해맑게 자랐는지도 몰라. 

보리밥에 고추장을 반찬으로 담은 양은 ‘벤또’를 같이 싼 책보를 어깨에 메고선 학교에 간다고 조그만 다리로 십리나 되는 산길을 갔네. 그때 친구와 나는 또래들 중에 키가 제일 컸지. 고개를 넘고 강가 험한 길을 따라 힘들어 하며 걸었었네. 땀을 배시시 흘리며 육년을 함께 다니지 않았던가. 여름날 뙤약볕에 험한 고개를 넘자면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오르고 목은 마른 논처럼 타들어 갔었네. 그 고개가 어찌도 그리 높았던가.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까마득히 보이지를 아니했네. 어디 하나 물먹을 데도 없었고 어디 하나 편하게 앉아 쉴 데가 없었네.

그래도 강가 길을 걸을 때는 얼굴을 담그고 맛난 강물을 마음껏 들이킬 수가 있었고 발가벗은 몸뚱이를 내놓고는 물오리들처럼 왁자지껄 헤엄을 즐겼지. 우리들은 영락없는 물오리들이었고 소금쟁이보다도 더 물 위를 잘 떠다녔지. 물 위에 뜨는 걸 땅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자유자재로 했지 아니한가. 우리 중에 유명 수영선수라는 건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을 걸세.

지금도 난 햇빛에 반짝거리던 순백의 모래를 잊지 못하고 있네. 맑은 유리알처럼 깨끗한 강물을 지나다 목이 마르면 그냥 엎드려 얼굴을 박고선 벌떡벌떡 들이켰지. 아무리 좁아터진 산골도 강가 모래밭만큼은 드넓었지. 우리는 매일 그곳을 강아지처럼 내 달리지 않았던가. 하늘만 빠끔한 산골에서, 휘도는 강물만 보고 자란 우리는 어쩌면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련한 산골의 생활이 우리의 가슴엔 더없이 싱그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던가.

자네는 공기업에서 좋은 시절을 보냈었지. 두주(斗酒)를 불사(不辭)하는 자네가 먹은 술의 양도 강물 같았을 걸세. 아마도 그게 자네가 우리 앞에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는 일일세. 자네뿐인가. 우리 동네서 같이 큰 우리 친구 녀석들이 전부 술고래들이었으니 아마 우리가 국가에 지불한 주세도 어마어마할 걸세. 

이제 책보 걸머지고 다니던 여섯 명이 전부 늙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각지에 흩어져 살다니 이제 친구꺼정 둘이나 떠나고 네 명이 남았네. 우리가 어려서 수염이 허연 어른들을 보면 까마득했는데 이제 우리가 거기에 와있네 그려.

몇 개월에 한번씩 만나서 술을 퍼마시며 지줄 재줄 대던 다섯 친구들이 참 좋았는데 이제 친구가 빠진 허전한 자리를 누가 메워주려는지. 아니 친구 자리는 허전한 대로 늘 비워놓고 있겠네. 친구는 영원히 우리 옆에 있는 거야 어떤 땐 형제보다도 가깝고 누구하고도 하지 못할 이야기도 우리 다섯이 모이면 거침없이 쏟아냈지. 나이를 먹으면 친구가 많을수록 좋다 하더군. 

지금 바깥은 깜깜한 밤이야. 새벽에 뒤척이다 세시 반에 일어나서 이 글을 적고 있네. 친구가 간 곳은 저 바깥처럼 어두워서는 안 되네. 사철 꽃피고 언제나 따뜻한 곳이어야 하네. 아플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는 곳이어야 하네. 우리가 어려서 뛰놀던 그런 하얀 백사장, 하얀 물만 있는 곳이어야 하고 진달래 피고 꽃다지 피던 따뜻하고 양지바른 곳이어야 하네.

이제 줄이네. 동쪽이 곧 밝아올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