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회령포’의 물도리 같은 인생

(1936년~ ) 이원면 김영옥 어머니

2022-12-30     김경희 시민작가

‘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셨다. 플라스틱 콜라병에 직접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이라고 써서 색깔 없는 테이프로 붙이셨다. 자녀분들에게 준다시며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당신과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라시며 옅은 미소를 보이셨다. 당신 스스로 60년을 담갔으니 요새 애들 말로 나도 쉐프라고 하시며 한 마디 더 건네신다. “한 숟가락 또르르 따라 넣어도 국 맛이 달라”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라고 그저 60년을 담았더니 진한 맛이 우러난다고 무심히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손맛은 바로 사랑이며 자녀들에게는 더없는 추억이다.

 

■ 돗자리 깔아도 충분한 나이

100세 시대라고 말들은 많지만 어디 100세까지 사는 게 쉽나. 나도 곧 89세. 100세 시대의 9할 가까이 살아냈다.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곡절이 없을 리 만무하니 돗자리 깔아도 될 만큼 인생이 보인다. 내일 모레 아흔인 내가 교복을 입어봤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리 어머니 교수님 같은 말씀하시네.” 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피 토하는 절규를 하고 인생의 말미에 알게 된 그 만고의 진리는 글 속에 있는 양보다 우리 손끝 발끝에 매달린 양이 더 많다.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 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 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회룡포’ 부르는 김다현이 보다 한두 살 더 먹었던 새색시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질기더니 88년은 어느새 빨리도 따라왔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김다현이라는 예쁘장한 꼬마가 나와서 노래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회령포’를 절절하게 불러댄다. 고것이 인생을 알기나 하나 불러대는 폼이 기가 막힌다.
워매! 생각해보니 내 저 아이 만할 때 우리 영감님한테 시집왔으니 참말로 어린 각시는 맞다. 춘향이도 열여섯 살에 이몽룡을 만났단다. 1936년 1월생, 우리나이로 88살이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내가 이 나이까지 살 줄은 미처 몰랐다. 수많은 곡절들이 있지만 푸념보다는 방도를 먼저 찾으면서 살아왔기에 파란만장하다는 말은 굳이 안하고 싶다. 영감에게도 내 속을 다 드러낼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내 새끼들은 내 속을 절반이나 알까. 

■ 가혹한 일제 강점기, 정신대로 끌려가던 언니들의 뒷모습

해방 전에 동네 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가는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같이 새참 나르던 언니들이 어느 날 없어지고 “누가 일본 어디로 갔대” 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아찔한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우리네 언니 또래의 그 할매들을 생각하면 피붙이가 아니어도 내 억장이 무너진다. 그 속을 어찌 달래며 살았을까. 

열다섯 여섯에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집에서 다들 서둘러 시집들을 보냈었다. 우리 손주들이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일들을 한 동네에서 보고 들으면서 살아온 할매다. 피눈물 삼키는 일들은 부지기수였다.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으니 녀석들이 우리네 속앓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굳이 버선 속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우리 자손들이 정직하고 근면하게 잘 살기를 바랄뿐이다.

■결혼, 새로운 인생이 파도처럼 밀려오다

내 나이 16살, 6,25 전쟁 후유증으로 힘든 시기에 결혼을 했으니 신혼이라는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보다 8살 위인 한참 오라버니뻘이어서 내가 16살, 남편은 24살 이었다. 내가 열여섯 살에 시집을 왔으니 남자를 알기를 하나 결혼이 뭔지를 아나 그저 시집가라니 색시가 되었다. 

영감님은 나한테 자상했다. 양반이었다. 우리 6남매 낳을 때 마다 한약 한재씩 꼭 들고 와서 산고(産苦)를 잊게 한 남편이었다. 우리 새댁시절 남편들은 다들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있어도 마누라한테 그런 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절 남정네들은 세상사 뜻대로 안 된다고 술 먹고 밥상 둘러업고 주사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우리 영감님은 그런 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영감님한테 더 고마웠다. 

■과수원집 마나님, 일꾼처럼 근면하게 일하다 

이원은 포도로 유명한 곳이라 포도 과수원이 그림처럼 펼쳐졌던 곳이다. 그림 그리는 이들이 보면 화폭처럼 보이지만 우리네한테는 먹고 살 거리였으며 새끼들 키우는 알토란같은 돈벌이였다. 외양간의 소 한 마리도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던 보물단지지만 과수원의 포도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면 부자 된 것 같았다. 
잘 영글어 우리 새끼들 공부시키고 우리 먹고 살 거리가 되니 고단 했던 농사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수출도 하고 구판장에 나가서 팔기도 했다. 제법 큰 농사꾼이었다. 억척스럽기보다 열심히 살았던 때다.

과수원집 마나님이었지만 일꾼처럼 일했다. 포도가 늘 수확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과실 값이 폭락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잘 꾸려나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몸이 힘든 삶의 무게보다 마음으로 조심스러운 큰일은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는 일이었다.

■마음은 애틋하지만 조심스러웠던 시아주버니 모시기 

처음 시집와서 작은 오두막살이부터 시작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시집살이는 안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시집살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게 됐다. 사실 남편 형님이라 어쩌면 시부모님보다 더 어려운 관계였다. 부모님들은 어른들이라 내가 자식처럼 돌보면 되지만 시아주버님은 잘해도 상 받을 일 없고 못해도 흉이 되는 어려운 관계였다. 처음에 결혼할 때는 시아주버님이 안 계신 걸로 알았는데 물론 남편도 나에게 거짓을 말 한 것이 아니었다. 시아주버님이 젊을 때 돈벌어보겠다고 나가셔서 연락이 안 된 상태로 너무 오래 뜸한 틈에 다들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없는 형제로 가슴에 묻고 살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우연히 시아주버님이 강원도에 살아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여러 번 다녀오고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모시고 오세요. 몸도 불편한데 모시고 같이 삽시다” 라고 했다. 내가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몸도 불편한 이가 혼자서 강원도에 살고 있다니 당연한 도리로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숙을 모시고 오니 동네 사람들이 누군가 궁금해하고 말들도 무성했다. 그래서 시숙 모시는 건 달리 어려운 게 아니라 잘해도 말거리가 되고, 못해도 흉이 되는 거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큰 아들이 10년 넘게 큰아버지랑 같이 지내느라 불편했을 텐데도 착한 아들이 큰아버지 봉양하면서 잘 지내주었다.

한 20년 모시면서 시아버님 모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심은 시아버님보다 더 어려운 분이었다. 돌아가시전에는 풍이 와서 목욕까지 다 시켜드리고 나도 큰 아들도 힘들었지만 우리한테 신세진다고 생각했을 시숙도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남한테 그것도 아랫사람한테 신세지는 걸 무심하게 넘길 이가 몇이나 될까. 다들 버거운 마음들을 추스르면서 살아내던 시절이다.

난들 아무리 시숙이 환자라고 하더라도 시숙인데 목욕 시키는 일이 수월한 일은 아니다. 남자 목욕을 시키는 일인데 처음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몸을 어떻게 씻겨야 할지 난감했지만 큰 아들이 옆에서 손길을 보태주니 그렇게 또 안쓰러운 분을 챙길 수 있었다. 우리 큰 아들이 지금도 남들 배려하고 잘 챙기는 건 아마도 태생에 마음밭이 착하지만 큰 아버지 모시면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몸에 배었을 것 이다. 그래서 세상사는 공짜가 없다고 지금 힘들다고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또 배움이 되기도 한다.

■상견례, 신문지에 싸들고 간 300만원

큰 아들은 40년 전 당시에 흔치 않던 연초학과에 가느라 충북대학교에 갔다. 그때 전매공사의 본사가 청주에 있었고 연초제조창에 바로 취업이 되는 학과라 청주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임용대기중인 아가씨를 만나 임자 나온 길에 결혼을 시키고 싶어서 상견례를 하자고 청주 모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준비를 했다.

300만원. 읍내 집이 450만원이었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배짱은 그때도 두둑해서 나는 신문지에 돈을 싸서 갖고 갔다. 아이들을 주고 결혼하는데 보태라고 했다. 우리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걸 보면서 나도 애미 할 도리를 할 수 있어서 내심은 뿌듯했다. 시골할매가 신문지에 싸들고 간 돈이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맛에 살았다. 열심히 농사짓고 소도 키우고 아이들 결혼할 때는 돈다발 들고 가서 안기고 땅도 팔아서 나눠주고. 그게 사는 맛이다.

■영감 몰래 뒤주 속 쌀 팔아 먹느라 진땀 빼던 날 

나는 남편이 외출하면 남편이 저 멀리 가는 발걸음 끝까지 지켜보고 잰걸음으로 뒤주로 갔다. 손에 바가지를 들고 부르면 큰 아들도 눈치 빠르게 리어카를 마당에 갖다 놓고 쌀 포대자루를 들고 왔다. 뭔일인가 싶지만 바로 남편 몰래 쌀 팔아먹는 날이다. 

내가 쌀을 퍼서 포대자루에 담고 아들은 그 포대자루를 리어카에 옮겼다. 우리는 대문을 나서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냅다 달렸다. 영감님한테 들킬세라. 영감님이 애들 용돈 짜게 주니 딸내미가 부족하다고 징징대고 애미가 어쩌겠나. 영감 몰래 쌀이라도 파는 수밖에.

아들이 리어카를 5리를 끌고 시장 방앗간에 갔다. 쌀이라서 주면 바로 현금이니 돈으로 바꿔서 다시 또 5리를 리어카를 끌고 온다. 군말안하고 읍내 시장까지 다녀오는 우리 아들.

딸 용돈 준다고 영감 몰래 쌀 팔아서 오는 마누라. 다들 시골살이 하면서 웃음 밖에 안 나오는 일이지만 쌀 팔아서 용돈 줬던 딸, 리어카 몰고 시장에 다녀온 던 그 아들도 환갑이 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무심하다.

■이제 동네 사랑방 주인으로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아쉬운 소리 안하면서 잘 살고 있다.

시골 할매, 대문 밖만 나가면 길 건너 10호 안팎의 이웃동네 초록 들판밖에 보이지 않으나 두려울 게 무언가! 영감 곁으로 가면 그리운 사람 만나서 좋고, 이승에 있으면 울 새끼들 볼 수 있으니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딱 좋은 나이다. 유행가 가사가 사랑하기 딱 좋다더니 살기도, 먼 여행 떠나기도 딱 좋은 나이다. 밖이 시끌시끌 한 거보니 동네 동생들이 오는 모양이다. 열무김치에 국수나 말아서 먹어야겠다. 아, 들기름 넣어서 비빔국수를 할까 아니 이제는 다들 나이 들어 침이 말라 물국수를 다들 찾으니 그래 물국수로 하자. 멸치가 어디있더라 다싯물을 내야지.이렇게 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여오시게 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