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씨의 친일행위를 두고 우리 사회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서정주 시인의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행위를 어떻게 볼 것이며 친일행위를 하는데 발벗고 나선 서정주 시인에게 과연 국민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수 있는 지에 대해서다.
서정주 시인이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로 시작하는 대표적인 친일시 `송정오장송가'를 비롯해 11편의 시나 논설 등을 발표한 흔적이 바로 그를 국민시인으로 부르는데 결정적인 오점인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눈부신 시적 기교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국민시인으로 추앙하게 하고 그를 좋아하게 만든 요인이라면 친일행적과 독재정권에 빌붙어 활약했던 그의 과거는 그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드는 요인이다. 서정주 시인을 비롯한 문단에서 친일행위를 한 흔적이 있는 문인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친일한 서정주가 국민시인(?)
해방 57주년을 앞두고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14일부터 판매된 실천문학 가을호에 `친일문학작품명단'을 발표했다. 이는 실천문학이 지난 봄호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행해진 친일파시즘 문학에 대한 연속기획의 하나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전쟁에 광분해 지원병, 위안부로 끌고 가거나 민족 탄압이 극성을 부린 시기에 한해 각종 잡지, 신문, 인쇄물에 발표된 시나 소설, 논설 등을 자료로 친일문학 목록을 종합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친일문학인들 중 이광수는 103편을 발표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고 주요한이 43편, 노천명이 14편, 모윤숙, 최남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고장 출신의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로 불리는 정지용 시인도 언급되었다.
1942년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에 발표된 `이토'라는 시. 그 동안 몇몇 평론가나 연구자에 의해 `친일적 색채'가 있는 시로 평가받고 있던 터다. 그러나 이번 발표에서 정지용 시인은 김정한과 함께 친일 시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정지용 시 `이토' 물고 들어가기
친일이라고 의심받을 만한 시가 단 한 편에 불과했고 그 또한 일제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발표였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다음은 `이토'의 전문.
『낳아자란 곳 어디거나/ 묻힐데를 밀어나가쟈/ 꿈에서처럼 그립다하랴/ 따로 짖힌 고양이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제/ 피였다 꽃처럼 지고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곻아진 흙에/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 시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기러기 한형제 높이줄을 맞추고/ 햇살에 일곱식구 호미날을 세우쟈』
이중에서는 특히 중간의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곻아진 흙에'라는 부분이 자주 지적되었다. 이 시는 어느 전사자를 위한 진혼곡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호미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모습으로 귀결하고 있음을 볼 때, 시인이 치밀한 계산 속에 의도적으로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애매하고 오리무중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점이 다른 친일시와 뚜렷하게 구분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이숭원(서울여대 교수)씨와 임헌영(중앙대 교수)씨 등이 그런 입장.
정지용 시인을 일반 주민들이 알기 쉽게 재해석한 글을 썼던 김성장(옥천상고 교사) 시인도 역시 이 시에서 자발적인 친일성을 찾을 수 없고 그 충성의 대상을 명백하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친일시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 문단의 친일문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온 임헌영씨는 `이토'를 친일시로 규정하려는 것은 자발적이고 진정한 친일파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평가하려는 진지한 의도보다는 `정지용 시인같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조차 친일을 했지 않느냐' 점을 부각시켜 `전 국민 친일파'라는 논리로 아예 친일파 논의 자체를 물타기시켜 버릴 우려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단의 공신력있는 평가가 가장 큰 의미
따라서 이번 친일문학작품 발표 결과 정지용 시인이 제외된 것은 그 동안 `이토'를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제기돼온 친일 시비를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더구나 이번 발표가 그 동안 문인 개인을 대상으로 한 친일문학 연구 발표가 아니라 일제말기 문학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정지용 시인은 전쟁범죄도, 평화에 대한 죄도, 인륜을 거스르는 반인도적인 죄악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민족시인이자 통일지향시인'(문학사상 2001년 8월호)이라고 평가해온 임헌영 중앙대 교수는 "이번 발표는 정지용 시인이 친일 논란에서 정식으로 제외되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친일시인이) 아닌 사람을 자꾸 넣으려고 하는 것은 물고 들어가기식밖에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성태 사무국장은 "그 동안 친일문학작품 발표는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이번에는 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객관적인 작품 근거를 가지고 종합적으로 평가해 발표되었기 때문에 공신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1937년 이후 모든 지식인들이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이미 문학적 성과를 평가받고 있는 정지용 시인을 친일 문학작품을 쓴 문인으로 포함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전 국장은 또 "선배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민족 앞에 사죄하고 이를 계기로 민족문학의 대의를 세워나갈 것"이라며 "역사적 단죄가 아니라 오점을 인정하고 상처를 안은 후 작품으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