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80대 노부부의 이야기 '먹고 살려면 들에 나가야지'
어느 80대 노부부의 이야기 '먹고 살려면 들에 나가야지'
  • 정순영 기자 soon@okinews.com
  • 승인 2012.11.09 11:42
  • 호수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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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씨 할아버지 부부가 집 앞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

동이면 한 이장님의 소개를 받아 마을 입구에서 김해월(가명, 85)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 댁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편 최영식(가명, 88) 할아버지가 고단한 표정으로 방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낮에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밭에 나갔다 온 것이 몸에 영 무리가 갔는지 기자를 보고 한참만에야 최씨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나오자 김씨 할머니는 "참, 먹고 사느라 죽을 똥을 쌌지, 할아버지 얼굴이 형편없잖아"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늙어서 얼굴이 그런 거지 어디 못 먹어서인가"라며 허허 웃음을 짓는다.

90세를 바라보지만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에 나가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두 분 앞으로 달달이 나오는 기초노령연금을 합하면 15만원. 하지만 매달 나가는 약값만 해도 십 만원이 넘고 노부부가 면사무소에서 매달 2만원씩 주고 쌀이라도 사다 먹으려면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툭 하면 여기저기가 아파 병원행이니 이 80대 노부부에게 들일은 '심심해서 하거나 자식들에게 조금씩 보내주려고 하는 소일거리'가 아닌 그야말로 생계형 농사인 것이다. 노부부 소유인 700평 논은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남에게 빌려주는 대신 1년에 80kg 쌀 한 가마를 받고 있고 두 부부는 이웃 사람에게 밭을 임대받아 고추농사를 지어 일 년에 80만 원 정도 소득을 얻고 있다.

할머니: 그전에는 우리가 논농사 직접 했는데 나이 드니 논에서 자빠지면 쑤셔 박혀 죽어. 농사지어도 남는 것도 없고.

할아버지: 논농사 지으면 트랙터로 논을 두 번 가는데 한 번 가는데 4만원씩 두 번에 8만원, 한 마지기당 기계로 모 심그는데 4만원 하면 12만원, 베는데 4만원 하면 16만원... 700평이면 3마지기 반인데 기계 삯만 그렇다는 거야. 거기다 비료값, 약값에 모판도 사야니 어디 농사 지어 남는 거나 있겠어.(웃음)

할머니: 하루 종일 둘이 가서 일해도 1천원어치도 안 생길 때도 많아. 논은 남 주고 밭은 둘이 기어 다니면서 짓지. 아이고 올해 일 하느라 죽을 뻔 했어.

두 노부부는 자식들에게 손 벌릴 생각은 아예 하지를 않는다. 자식들도 제 새끼 먹이고 입히느라 힘든데 어떻게 손을 벌리겠냐는 것. 그나마 면사무소에서 매달 2만원 주고 2kg 쌀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며 고추농사를 지으니 고추장 담은 걸로 반찬은 하면 된다는 말에서 기자의 코끝이 찡해져 온다.

할머니: 요즘 내 걱정은 인생 끝마무리를 어찌해야 할까야. 내가 먼저 죽으면 할아버지가 고생이고 할아버지 먼저 가셔도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얹혀 못 살거든.(웃음) 그런데 내가 눈물이 다 말랐나벼. 부애(화) 나면 밭에 가 울고, 속상하면 밭에 가 울고, 만날 밭에 가 울었더니 이제 눈물샘이 다 말랐나벼. 예전에는 애들 학교 보낼 때 돈 달라는 날에 못 주면 보내놓고 울고 밭에 가 울고 그랬는데 그 눈물이 이제 다 말랐나벼.

가을걷이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들녘 어디에서도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는 소리가 쉬이 들리지 않는다. 도시에선 농산물 가격이 너무 올랐다고 아우성이지만 정작 농민들 주머니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 올해는 날씨까지 속을 썩여 농산물 수확량 자체가 크게 줄었다고 농민들은 한숨을 쉰다. 곧 대통령 선거라지만 어느 후보 하나 농업농촌을 생각하는 공약 하나 이야기해주지 않고 지자체도 농협도 실망감만 안겨주는 요즘, 농민들은 그저 한 해 동안 서로 수고했다고 위로를 나누며 막걸리 잔을 건넨다.

차씨 할아버지댁 1년 가계부

수입 지출
현물 쌀 80kg 1가마   약값 11만원 x 12개월 = 132만원
현금 노령연금   쌀값 2만원 x 12개월 = 24만원
  7만5천원 x 2명 x 12개월 = 180만원   할아버지 병원비 100만원
  고추판매금 80만원    
260만원 25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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