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나 새해를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이 앞서서인지 모르나 까닭모를 불안감이나 황량감, 또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을 12월31일 오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분의 상점을 찾았다.
"나 오늘 한 사람 구했어요."
난데없는 얘기에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농약상을 하는 이 분의 얘기인 즉, 슬리퍼를 신고 들어온 한 손님이 난데없이 `농약'을 한 병 달라더란다. 겨울에 특별히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농약을 사가려고 한다니 퍼뜩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들었고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농약을 파는 대신 마침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설득을 시작했다. 영동에 산다는 이 사람은 결국 이 분의 설득에 눈물 바람을 하며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는 것으로 다행히 그냥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 싶어 농약을 사러 왔다는 사람이 묵고 있다는 숙소를 확인하고 파출소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전화를 한 후 일단락을 지었다.
그후 지금까지 우리 고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려 오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이 분의 재치로 한 목숨이 지켜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 자살을 결심하고 농약을 사러 들어갔던 사람의 심정이나 상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이 일이 농촌의 실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내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고장이 이제 더 이상 희망을 캘 수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나마 젊은층으로 분류되는 우리 고장의 40대, 50대들이 자꾸 고향을 떠나는 현상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농촌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증거들이다. 어려워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도시에 나가서 번듯한 직장 잡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다.
"지금 그 사람 집에 없어. 이것저것 안되니까 나간 거지 뭐."
어떻게 해서 젊은 사람의 이름이 나올라치면 몇몇에게는 이런 설명이 붙는 게 지금 우리 고장의 현실이다. 어떤 사람은 고향을 떠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는 얘기. 고향을 떠난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주민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자잘한 소문과 커지는 말들이 고향을 지키며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 후벼판다.
IMF 경제위기를 겪고 난 후 우리 고장 인구 감소율이 크게 증가했음을 인구통계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같은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는 새해영농설계교육이 9일부터 시작되었다지만 농민들은 또 올해는 무엇을 심어야 하는 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떠나는 사람 떠나도 남아 있는 사람은 나름대로 살 길을 마련해야 하는 것. 그게 세상사는 이치인 모양이다. 각종 언론에서는 신용카드 연체율이 10%대를 넘어 위험수위라고 떠들고 있지만 정작 농민들이 비교적 이자가 싼 영농 정책자금을 대출받아 뼈빠지게 1년 농사지어도 30∼40%의 농민들이 대출을 받아 빚을 갚는 이른바 돌려 막아야 한다는 농촌 현실을 제대로나 알고 있을까?
마침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과정에서 `농촌 회생대책'을 얘기했고 기업들 워크아웃하듯 빚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이 회생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 약속에 농민들은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차라리 이것저것 체념하니 편하다'는 농민의 말이 나오기 전에, 더 이상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이 양산되기 전에 이 나라, 아니 선거로 당선된 우리 고장의 지도자들은 무언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치단체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는 중앙정부의 지원을 바랄 수 없다. 아직도 우리 고장 산업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남들 하니까 단위사업 하나 따라 하는 것보다는 하루빨리 군 농업발전대책을 세우고 큰 그림 속에서 우리 고장 농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안과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 가자고 설득하는 것이 고향을 떠나려는 `젊은 농민'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길이다.
특단의 인구유입대책이란 `자치단체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주소 옮기기 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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