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감사합니다. 이혜주입니다.”
연신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인터뷰가 끊어지는 시간이 되풀이되곤 한다. 철도청 대전지역본부 영업과장. 이혜주(57·대전시 서구 월평동 거주)씨. 철도청 영업과장이란 자리가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님을 이혜주씨를 통해 알았다. 당장 대전지역본부에서 관할하는 역이 103개에 달한단다. 103개 역의 여객과 화물운송은 물론 관광상품 등 영업전반에 대한 기획을 하고 추진하며 각종 보상건도 맡아서 하고 있는 자리이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민원이 50∼60건에 달하기도 한다.
철도청에 몸 담은지도 40여년
그가 철도청에 몸을 담은 지도 어느덧 40년 세월이 다 되었다. 지난 66년 철도청에 몸을 담은 이후 만 38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정말 그의 철도청 직장 경력은 화려(?)하다. 기능직으로 출발해 수없이 많은 시험과 관문을 통과해 얻은 자리가 지금의 행정사무관 자리이다. 그는 옥천실고 3학년 말, 졸업을 앞두고 철도청에 취직했다.
38년간 달려온 폐활량 큰 마라토너
처음에는 역무원부터 시작했다. 이후 차장에, 부역장을 거쳐서 영동군 황간역과 경북선이 다니는 경북 상주 아래의 옥산역장을 역임했다. 철도청에 들어간 그는 비록 처음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오늘이 있기까지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제 결승점이 보이지만 그는 아직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폐활량이 큰 마라토너임에 분명하다.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랐던 친구 박춘(동이면 적하리)씨는 그를 ‘엄청나게 노력해 자수성가한 표본’이라고 소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이기에 자수성가했다고 자신있게 추천하는가?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공무원을 퇴직하신 아버지가 소정저수지를 건설한 후에 불합격 판정을 받아 준공을 하지 못하셨어요. 한 번의 사업실패로 집안이 기울었죠.”
그래서 학창시절의 그의 기억은 힘든 일로 점철돼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꼭 배우겠다' 결심
“책을 사고 싶었지만 못 샀어요. 그래서 교과서를 옆 반에 가서 빌려다 봤죠. 체육시간에는 사정 모르는 선생님에게 체육복 입지 않았다고 기합도 받았고요.”
납부금 내지 않았다고 등교정지를 당하기도 했고, 수학여행 한 번 갔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을 추억할 앨범 한 권이 없다. 지금도 이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얘기가 나오면 하는 말이 있다. 웬만해선 아예 포기하고 돈을 벌러 나섰을 텐데 이혜주씨는 그러지 않았다. ‘꼭 학교는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 이 과장의 설명.
40여년 우정 키운 친구들 있어 행복
세천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했을 당시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던 몇몇 친구들이 통학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손을 흔들며 학교로 가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그래! 너는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나는 열심히 일해 승진에 뒤떨어지지 않겠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어려움은 어려움이고, 친구들간의 우정은 우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놀만한 시설 등이 별로 없었던 시절, 통금시간까지 놀 수 있었던 장소는 옥천역이었다.
옥천역에서 밤늦도록 놀다가 역무원 아저씨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지금의 부산당 네거리에 있던 박춘씨의 집이 그들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재미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술을 나눈다. 벌써 40여년간 키운 우정이다.
“지금은 고향 옥천에 기여하는 것이 없지만 기회와 여건만 된다면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봉사하겠다는 마음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술 한 잔 먹으면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지요.”
일곱 남매의 넷째인 이 과장이 우리 고장 출신 언론인으로,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이혜태 전 중도일보 사장의 동생인 것을 인터뷰 도중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