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도 동료도 없다. 매일 개인 작업실에서 홀로 일한다. 존경했던 사람은 집안사람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 선생뿐이라니, 인터뷰 직전까지 말수가 적은 사람일까 자못 걱정됐다. 쓸 데 없는 걱정, 만나는 내내 그는 열정적이었고 즐거워보였다. 고서를 구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다 모은 골동품을 보여주고, 그가 거닐어온 예술의 길을 이야기했다. ‘전통을 부순다’는 이야기는 언뜻 과격해보이지만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즐겁다. 인터뷰 내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신에게는 스승이 없었지만, 그는 이제 누구보다 제자가 많은 사람이다. 붓 하나 달랑 들고 책상 앞에서 글씨 연습하던 어린 학생이 이제는 대학과 지역 문화원에서 20년 넘게 강의해온 큰스승이 됐다. 인터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싸구려 붓 한 자루
아무 가게에서나 살 수 있었던 싸구려 붓 한 자루가 있었다. ‘서예’를 생각하면 항상 그 붓 한 자루가 생각난다. 국민학교 4학년 습자시간이었다. ‘무궁화 삼천리’를 쓰며 글씨 연습을 하던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뒷짐 지고 오더니 한참을 옆에 서 있었다. 그때는 선생님한테 맞기도 자주 맞았던 시절이라 선생님이 왜 안 가시는지, 어찌나 가슴이 콩닥댔는지 모른다. 한참 만에 선생님이 꺼낸 말을 65살이 넘은 지금도 기억한다.
“김선기, 글씨 잘 쓰네?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선생님이 대뜸 글씨 쓴 종이를 들고 나가서 칠판에 침 발라 붙이며 ‘너희 모두 이거 보고 써라’라고 했을 때, 그 감동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린이들은 모두 그렇다. 한 번 칭찬을 들으면 또 그 칭찬을 듣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다. 이른 새벽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너 잠 안 자고 뭐하니?’라고 물을 정도였다. 집 곳곳에서 종이를 찾아내서 보이는 족족 글씨 연습을 했다. 그 뒤로 선생님께 다시 칭찬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 칭찬 한 번이 한 인생을 바꿔 놓은 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추사 김정희의 길
경주 김씨 집안의 자랑은 누가 뭐라 해도 추사 김정희 선생이다. 한 글씨 하는 것 같으니 자연스럽게 추사체를 이어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큰 벽이 있었다.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국전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국전에서 도무지 추사체로 쓴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전 대회에서도 추사체로 쓴 작품이 수상한 적이 없었고, 다른 대회에서도 추사체로 상을 받은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건대 참 그럴 만하다. 추사체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다. 기초 필법이 없다는 말이다. 심사위원들이라고 어떤 글씨가 경지에 올라선 글씨인지 기준을 삼을 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추사체에 대해서는 추사대회가 따로 열린다.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을 보면 된다. 추사체를 만들기까지 김정희 선생의 인생을 봤다. 김정희 선생은 기존의 글씨체부터 모두 섭렵했다. 추사체를 만든 건 그 이후 제주도로 12년 귀양살이를 떠난 후다.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그도 다섯가지 글씨체를 착실히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그에게는 스승도 동료도 없었다. 책으로 배우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가 쓰는 게 정말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중국 유명 서예가들을 만나 그들의 글씨를 보고 싶었다. 당시는 집이 몹시 어려웠던 때였다. 슬레이트집에 월세를 내며 근근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답답함을 이길 수 없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450만원 빚을 내서 결국 중국에 8일 동안 다녀왔다. 눈이 빠져라 그들의 붓을 놀리는 것을 보면서 글씨가 조금씩 고쳐나갔다.
■ ‘평거’의 길: 전통을 부수다
기본기를 닦고 난 후 못 쓸 게 없어졌지만 추사체가 다시 생각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현재 눈앞에 있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전시회를 개최해도 젊은 사람들은 어느 그림 하나 앞에 멈춰선 법이 없다. 빠른 걸음으로 전시회장을 한 바퀴 휙 돌아 나간다. ‘저 친구들의 발을 멈춰 세울 방법이 있을까?’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서예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의 눈을 붙잡고, 그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혹은 그들이 흥미로워 할 수 있는 글씨가 있을까. 생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서예가 꼭 ‘검정색’일 필요는 없다. 파랗고 빨갛고 글씨 색깔의 농담을 달리하면서 각종 색을 섭렵했다. 서예를 꼭 ‘붓’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 몽당 빗자루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봤다. 칡뿌리를 소금물에 삶아 두들기고 빗어서 그만의 붓을 만들었다. 서예를 꼭 ‘정자세’로 쓸 필요도 없다. 멀리 화선지를 두고 붓을 던져보기도 했다. 선생도 동료도 없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서예를 하면 된다. 그는 ‘전통을 부수고’ ‘놀아보기’로 했다.
■ 서예가 최고의 영예, 순조임금 상량문을 쓰다
1989년 국전 첫 입선에 이어 특선, 각종 서예대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본전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현판과 아펜젤러 공원 표지석 글씨 등 그가 감사하게 받아온 자리가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자리는 ‘순조임금 상량문’이다.
2009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 대치동에 있는 인릉 정자각이 낡아 해체·보수하던 중 종도리 상단 장여 부분에서 조선 순조임금 상량문(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날짜의 시간 등을 적은 글)이 발견됐다고 했다. 원본은 색이 많이 바라고 부식될 우려도 있어 보존 처리 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할 예정이니, 똑같은 붉은 명주비단에 상량문과 중수기문을 다시 써달라는 이야기였다.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 약 5개월 동안 매일 아침과 저녁 목욕재계를 하고 향을 피웠다. 연습용으로 쓴 종이만 200장이고 명주비단은 150m다. 손끝에 피가 나고 붓끝이 닳아 3번을 바꿨다. 한번은 연습 중 피를 한바탕 쏟았다. 다시 하라고 하면 이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서예가로서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영광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서양화와 서예, 4월30일 전시회
글씨와 마찬가지로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해 미루고 미루다 2016년에서야 그림에 손을 댔다. 한여름 녹음이 푸른 날이었다. 미국에서 30년 살다가 온 제자 한 명에게 ‘서양화가 어려운 것이냐’고 물었다. 제자는 웃으며 일단 그려보시라 이야기했다. 붓과 캔버스, 물감을 선물로 주고 갔다. 처음에는 캔버스에 그려야 하는 것도 잘 몰라서 종이에 물감 찍어 그렸더니 붓이 잘 안 나가 고생도 했다. 하지만 미루고 미룬 꿈인만큼 한 번 시작하니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에 국제아트홀에서 만난 공주 교육대 박홍순 교수가 ‘서예를 하던 분이라 그런지 그림이 남다르다. 다른 데서 배우지 말고 계속 혼자서 그려보시라’라고 말해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어느덧 전시회다. 그는 서양화 30점과 서예 60점을 준비했다고 말하지만, 서양화인지 서예인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작품들이 많다. 아니, 서양화와 서예의 통념에서 모두 벗어났다. 기대하고 전시회를 찾아셔도 좋을 것 같다. 전시회는 대전 예술의 집에서 4월30일부터 5월5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