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금암2리] 효자문, 도유형문화재 간직한 마을
[동이면 금암2리] 효자문, 도유형문화재 간직한 마을
<금암2리...1992년 12월 5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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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암2리

   
동이면 금암2리는 올해 이전까지만 해도 법정리동상 금암리, 행정리동상 압촌리와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올해 1월1일 압촌리로부터 행정적인 분구를 이루었다.

분구 이유야 다양하거니와 함께 통합되어 있던 압촌리(현재의 금암1리)와는 사실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는 바람에 마을이 분리된 느낌을 줘왔고 또 한편으로는 압촌리 내 큰 마을인 압구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균형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는 신촌리 주민들의 소외감도 작용했다. 이러한 상대적인 소외감은 신촌 전체 주민들의 숙원으로 자리잡았고 그 꿈이 바로 올해 1월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주민들의 의욕은 상당하다.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던 마을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이제서야 온 것이라며 지난 1월 13일에 가졌던 마을 분구 자축행사의 기분을 이어가고 있다. 주민들의 이러한 분위기는 지난 94년에 완공한 신촌 할머니방 완공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을 한가운데로 고속도로가 막혀 있고 압구정까지의 거리만도 1km에 가까워 겨울에는 노인들이 압구정 마을까지 갈 엄두를 못냈던 현실적인 문제가 결국 할머니방 건축으로 이어졌고 지금에 와서는 그 건물이 마을회관 및 경로당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건축된 경로당은 말 그대로 주민들의 땀과 노력이 구석구석에 배인 정성의 결정체이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거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출향인들에게서도 협조를 받았다. 주민들은 또 1개월 이상은 공사 현장에 나와 일을 거들었다. 이런 정성의 이면에는 터를 희사한 전씨문중의 협조정신이 큰 몫을 차지했다. 

금암2리를 신촌이라 부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4백여년전의 일이다. 흔히 신촌, 또는 새말이란 지명은 주로 최근에 새로 생겨난 마을을 일컫거니와 이미 4백여년 전에 새로 생겼다 하여 부르던 지명이 지금에 와서도 새말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 엽 효자의 효성에 감복한 호랑이가 물자리를 잡아주었다는 호천(虎泉)이란 샘이 그 대표적인 예로 온 나라안에 이름을 떨친 전 엽 효자가 선친인 전팽령 선생의 시묘살이를 끝낼 즈음 호랑이가 나타나 먹을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마을을 위해 샘 자리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파보니 맑은 물이 솟아나왔고 그때부터 주민들은 그 샘 하나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먹을 물을 해결해 왔다. 또한 전 엽 효자가 시묘살이를 할 당시에는 흰제비 한 마리가 시묘막(움막)에 집을 짓고 3년 동안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는 전설도 있어 하늘이 낸 효자라는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1566년 조선 명종때 효자로 정려되어 효자문이 세워졌다.

금암2리의 도지정 유형 문화재는 2건이다. 먼저 도 기념물 제 29호인 양신정은 1545년 인종 원년 전 엽 효자의 아버지인 송정 전팽령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와 있을 때 독서도 하고 글도 가르칠 수 있도록 금강변 목담 호수가에 세운 것으로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위풍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양신정 바로 아래에 위치한 목담 영당은 본래 목담서원이 있다가 없어진 곳에다 영당(사당과 같은 기능)만을 지은 것으로 지금은 논이 되었으나 호수를 이루었던 목담 호수가에 지은 것이다.

이 영당안에 모셔져 있는 사서공 전 식 공의 영정이 도 문화재 제 171호로 지정된 것은 지난 92년이었다. 조선 후기의 초상화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 헌 선생의 의병 진영에 참가해 청주성 탈환의 승전보를 조정에 전해주러 갔다가 금산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대신 조 헌 선생을 비롯, 7백 의사의 시신을 거둬 의총을 마련한 사람이 전승업 공이라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찌되었든 금암2리는 옥천전씨 문중이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 온 곳으로 현재까지 15대째 후손이 마을에 거주한다. 지금은 전체 45가구 가운데 10가구만이 남았다.  마을 주민들은 포도를 주로 재배한다. 마을의 자체 경지면덕 24.9ha 가운데 포도 재배 면적은 9.5ha에 달한다. 자유당 이전까지 가장 못사는 마을로 꼽혔으나 포도농사를 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금암리에서는 처음으로 전대하, 전철하, 이용태씨 등 3명이 30여년 전부터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마을이 지금과 같이 45가구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적하리 분지벌에 살던 주민들 11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지만 지금도 집단이주해 사는 곳을 분지벌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목담영당으로 가는 진입로 확포장이다. 도 문화재가 두 건이나 있음에도 진입로가 좁고 포장도 안돼 이미지까지 흐려질까 우려하는 분위기이다.  마을은 작지만 단결하는 마을 금암2리에는 마을을 위해 관심을 쏟는 출향인들도 많다.

전재천(청주시청), 이승성(인천), 이태열(독일 거주), 전재경(대전실전 서무과장), 전재진(대한항공 기술부장), 전재봉(충남도시가스), 전인(대덕 원자력연구소), 이장주(임업협동조합), 김남기(서울 거주)씨 등이 그들이다.  마을에서는 자체적으로 효행심을 높이기 위해 94년부터 90세 이상의 장수노인들에게 장수패를 전달해오고 있는데 여봉수씨는 효자로, 박희용 영농회장은 성실한 농사꾼으로 꼽히고 있다.  마을 잡일을 돌보는 부녀회의 노력도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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