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면 소재지 및 면내 일원에는 타면에 비해 효자비 및 효자문 등이 많이 세워져 있다. 그만큼 면민들이 선행과 효도를 많이 했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주민들 또한 평소 덕행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데 인색하지 않은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의 하나가 안남면 연주리 면사무소 뒷편 밭이 끝나고 야산이 시작하는 지점에 자리한 김용준 효자비각이다. 이 효자비각은 생전에 그의 효행을 후세에 남기고 뜻을 이어 받기 위해 광산김씨 문중에서 비를 세우고 두평의 다포식 목조기와 비각을 세운 것이다.
면소재지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에 따르면 김용준 효자는 1864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자상하여 항상 이웃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김효자가 8살 때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도 먹지 않고 어찌나 슬퍼하는지 전주민은 물론 문상을 온 손님들까지 울지않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도 슬피 울어 그 어머니가 더욱 마음 아파하자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이 아플까봐 슬픔을 참고 장례를 모셨다고 한다. 그후 홀어머니 모시기를 하늘같이 하면서 최대한 봉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어머니가 병을 얻어 눕게 되자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를 해드리고 어머니의 대변까지 일일이 맛을 보아가며 약을 해드렸으며, 아픈 상처가 생기자 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모시니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였다.
이와 함께 주민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기에도 힘을 써 현재 효자비 옆에 자선비까지 세워져 있어 효(孝)와 선(善)을 함께 행한 사람이었다. 해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두 말씩 쌀을 보태줘 1년에 1백석 정도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쓰여졌다고 후손들은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유명무실하지만 집안 소유였던 안남장터의 땅을 개방해 무료로 장군들이 장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듯 김효자는 효행과 선행을 다해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어려웠던 시기에 재산 좀 가졌다고 타 주민들을 업신여기며 일만 부려먹을 생각만 했던 일부 지주의 모습과는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김효자는 생전에 덕행을 많이 쌓고 여든 두살 되던 해인 1946년에 세상을 뜨니 효자비를 세워주었는데 비에는 관명인 김노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孝子金老成之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