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보은이 쌀농사로 농업분야에서 앞서갔다면, 70년대는 옥천이, 70년대 이후에는 영동이 발 빠르게 지역특화작물로 앞장서 가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지금도 그 순위를 그대로 고수해 영동이 포도, 곶감, 표고버섯, 호도 등으로 지역특화작물로 전국에서 그 이름을 얻어가고 있는 반면에 옥천은 시설포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보은은 쌀농사만 고수해 하향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동이 포도 재배 면적을 부지런히 넓혀가 2천ha가 넘어가고, 또 가공식품으로 샤또마니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옥천은 시설포도만 700ha 정도를 유지해 그 차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따끔한 분석도 내놓았다. 알아줬던 곶감인 ‘청산시’를 영동이 선점한 것도 농업전략의 부재라는 것이다.
도 농산지원과에 근무하면서 더 넓게 볼 줄 아는 그였기에, 또,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나름대로 내린 그의 평가였다. 그는 이제 먹는 것과 엔터테인먼트가 결합한 ‘팜스테이’나 ‘체험활동’을 적극 구상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지역특화작물을 이용한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식품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군북면 자모리의 주 생산작목인 ‘부추’같은 경우, 부추보다 ‘부추김캄를 특화시켜 선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도내 친환경농업을 담당하는 책임자인 그는 정부에서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기 위해 예산이 많이 지원되니, 되도록 많은 계획을 세워 신청하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옥천군도 마찬가지지만, 각 시군에 친환경농업을 담당하는 인력이 적어 업무가 과중되면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있다”며, “앞으로 각 자치단체 별로 ‘친환경농업 담당’을 별도로 신설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30년 넘게 농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고향의 농정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은 듯 했다.
농정직 공무원만 30년 넘은 베테랑
도 농산지원과장을 맡고 있는 김정수(55)씨다. 옥천 사람으로는 현재 도에서 최고 직책이다. 도에서 근무하는 32명의 옥천출신 공무원들의 모임인 옥천향우회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증약초(19회)와 옥천중(14회)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합친 과정인 당시 대전농전에 들어가 4학년 때 공무원시험에 합격한다. 첫 부임지는 1968년 천안시 광덕면. 그는 69년에 고향인 옥천의 안내면에서 근무하다가 옥천읍, 안남면, 군 농산과를 거쳐 75년 1월 도청으로 가서 줄곧 도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사무관으로 승진시에 보은군 산업과장으로 3년 동안 있다가 종자생산시험장장을 거쳐 4급 농정서기관이 되어 현 농산지원과장까지 오른 것이다. 방송통신대 농촌개발학과 1기 졸업생이고, 대전대 경영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현재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수박다리 부치댕이서 목욕도 하고
그의 고향은 땅도 비좁고, 옛날부터 가난으로 이름난 ‘아랫자모리’였다. 가난했기에 살려고 특수작물을 개발했고, 수박, 참외 토마토 등 과수를 하다가 운반이 가벼운 부추에 이르기까지 자모리는 그 땅에 맞는 특수작물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했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여든에 가까운 나이지만, 포도 1천 평을 포함한 5천여 평의 농지에 농사를 지으면서 아직도 정정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 정도로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며 부모님 칭찬이 대단하다.
그의 어린시절은 그야말로 개구쟁이였다. 여름에는 이백리를 거쳐 수박다리, 옥각리 앞 부치댕이에서 멱 감으러 다니고, 옥천중까지 한 시간 반의 통학거리를 철둑길로 열심히 걸어다녔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체력이 다 어렸을 때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들을 품어준 고향 산천이 너무 그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옛 친구들은 현재 옥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대전농전 같이 다닐 때 학생회장을 했던 이근성씨는 그 근성을 발휘해 아직 정치에 뜻이 있는 것 같고, 한용택 농협중앙회 군지부장도, 황인호 보건소장도, 김봉수 청성면장, 송병우 주민지원과장이 다 중학교 동기들이다.
증약초 동창들은 한 달에 두 번씩 만나고, 옥천중 동창들은 분기마다 1번씩 만나면서 오랜 만남을 갖고 있다. 수질보존구역으로 개발이 제한된 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 친환경적인 삶과 농업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옥천의 미러라고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고향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조언을 하겠다는 그의 경험이 고향에는 또 하나의 큰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