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요? 탯줄도 거기에 묻었으니 나중에 내 뼈도 거기 묻을 곳 아니오? 결국에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란 말이지요.”
청산면 장위리 양짓말에 살던 개구쟁이는 이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한 나라의 보건복지를 책임지는 주요한 자리에 올라 있었다. 지난 7월 차관인사에서 신임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임명된 송재성(57)씨다.
지난 6일 과천정부종합청사 보건복지부 차관실에서 만난 그는 모처럼만에 어린시절 이야기를 꺼내서였는지 얼굴이 한층 밝아보였다. 청산초(45회)와 청산중(15회)을 졸업하고, 청주고와 성균관대 2학년 때 행정고시(16회)에 합격해 보건복지부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송 차관의 경우도 고향에서의 삶보다도 외지에서의 삶이 수치상 더 길었지만, 추억의 밀도에서는 비할 데가 못됐다. 유년시절의 기억은 이미 그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고향의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며 말하는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장위리 아이들은 수영선수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물가를 꼭 지나야 했다. 바로 장위리 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그들에게 항상 풍족한 놀이터였고, 학교에 가기위해서는 꼭 건너가야 할 길목이었다.
“야행성인 쏘가리와 메기, 빠가사리는 낮에 자거든요. 돌멩이 틈 사이에서 숨어 자는 이 녀석들은 조심스레 다가가면 자느라 몰라요. 그래서 낮에는 물가를 돌아다니며 빠가사리, 메기 등을 잡았고, 밤에는 기름솜방망이 들고 피라미나 모래무지 등을 잡았죠. 눈만 뜨면 하는게 수영이고 천렵이었으니까 고기잡는데는 선수였지요.”
고학정이라는 정자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다. “거기 한곡리 장군바위 있는데 외로울 고, 배울 학이라고 해서 고학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어요. 절벽위에 만들어 놓아서 그 곳에 올라 가끔 다이빙을 했어요. 장사래 보 절벽 진달래 피는 곳이라면 다 아는데…. 거기서 다이빙하다가 사고를 당한 아이들도 여럿 됐지요. 지금은 ‘곽짱이라고 부르지요. 정자는 없어졌고.”
가난한 농군의 아들, 5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는 가난해서 못 먹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단다.
“그 때 섭취한 단백질의 대부분은 미군이 준 분유에서였어요. 가끔가다 올갱이, 물고기 잡아서 허기를 채우고, 마을에서 돼지 한 마리 잡는 날에는 큰 경사였어요. 특별히 놀 것도 없었고, 그래서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밥먹고 난 다음에 할 일이 뭐 있습니까? 뛰어다니면 배 꺼지니까 나가 놀지도 못하고, 잠을 자거나 집에서 책 읽는 것이 전부였지요. 저는 마침 형들이 미리 본 책들이 있어 심심함을 덜었죠. 참고서 하나만 제대로 독파하면 전교 1등이었어요. 아! 그 당시 축음기가 있었는데, 이광재 아나운서의 축구중계도 듣고, 남인수, 황금심의 노래도 들었죠.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안에 정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줄 알았어요.”
그는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 농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은 것은 순전히 노동력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늘어놓는 재밌는 이야기 한토막.
“학교 앞에 맛있는 빵집이 있었어요. 제가 학교 반장이라 학급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빵을 460원어치를 사서 아이들한테 인심을 썼죠. 그 때 당시 짜장면 가격이 5원이었을테니까 꽤 큰 돈이었죠. 별 생각없이 썼는데, 그 때 담임이었던 6학년2반 육심용 선생님은 나를 혼내지 못하고 옆반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귀퉁배기를 후려쳤어요. 그 때 이게 큰 잘못이구나 알았죠. 아마 지금 공무원하면서 공금유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은 것은 그 때였을 거에요.”
살기좋은 농촌 만들터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처음 발령받은 곳이 옥천군이다. 그는 옥천군 새마을담당관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75년도에 옥천에 상수도사업을 처음 시작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에서만 쭉 이어지는 그의 이력. 88년 국민연금국 연금정책과장, 90년 대통령비서실 근무(사회복지, 환경 담당), 92년 보사부 국제협력관, 95년 보건복지부 사회복지심의관, 98년 보건정책국장, 의약분업추진협의회 위원, 2002년 기초생활보장 심의관, 2003년 사회복지정책실장, 2004년 보건복지부 차관에 이르기까지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력을 쌓아갔다.
어느 일간지에서는 그에 대해 ‘최고일꾼으로 알려진 정통행정관료로 전문성과 추진력이 뛰어나 제갈공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음. 연금, 보험, 의료, 한방, 국제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고,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의약분업 등 굵직한 현안사업을 무난하게 처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77년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기려 할 때 당시 신현확 장관이 스카웃해 보건복지부에서 일을 계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 현재 운영되는 보건복지법 62개 법안 중에 28개 법안을 송 차관이 만들었다고 하니 위의 평가가 공치사는 아닌 것 같다.
“공무원이 하는 일이 제대로 된 정책생산하는 일이지요. 제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에요.”
그는 옥천군의 복지에 대해 ‘복지옥천’을 내세운 슬로건이 맘에 들고, 보건소 옆에 노인장애인복지관에 대해서도 잘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지난번 김화중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약속한 ‘종합사회복지관’은 군에서 땅을 마련하는 대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1일 친구들이 초청해 청산면 대성리 원종호씨 집에서 옛 친구들 30여 명과 즐거운 회포를 풀었다는 그는 옛 친구들과 고향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농촌 복지와 관련해 더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다음 약속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번은 고향 분들에게 인사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자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