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단호했다. 이목구비가 분명한 그 얼굴에도 고집스러움이 흘렀다. 사물놀이나 국악을 포함한 우리의 전통악기에서 나오는 음악, 전통 춤과 무예에서 나오는 몸짓, 혼을 담은 예술품 만들기 등 어느 것 하나도 익히려는 노력이 없다면 진정한 한국인이라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듯 했다. “우리가 과연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이 태어난 산하를 잊지 않고, 그 속에서 수천 년 동안 흘러내려온 우리의 전통문화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집스럽게 붙잡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우리 안에 잠재된 신명을 불러내고자 했다. 그걸 밑바탕으로 해야 우리의 자신감이 묻어난다며, 그는 우리 전통의 기초다지기에 대해 강조하고 또, 힘주어 말했다.
방향을 제시했던 유년의 기억
안내중 학생들에게 방학 내내 풍물을 가르치며 씨름하고 있는 조진국(37)씨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의 고향(안내면 현리)과 모교(안내중)에서 풍물을 가르쳐 무엇보다 뜻깊다고 말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 청산면 효목리라고 말했다. 청동초 5학년까지 다니고서 청주 모충초에 전학을 갔다면서 효목리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자신의 삶의 좌표를 설정해줬다고 말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지신밟기 풍장을 신명나게 했죠. 동네 한 아저씨는 약 10m가량 되는 열두발 상모를 잘 돌려서 저도 집에 가서 짚새기를 엮어 따라했던 기억이 있어요. 한 할아버지는 태평소를 기막히게 잘 불었죠. 어릴 때 농악은 우리네 일상이었고 하나의 삶이었죠. 그 때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내 천직으로 삼은 풍물에 대한 어떤 계시도,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할 인간의 도리에 대한 배움도 고향에서 이뤄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감으로 승화됐고, 저는 당당하게 청소년기와 성년기를 보냈습니다.”
예술로 먹고 살고 싶었다
청주 운호중과 세광고를 졸업한 그는 청주사범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다. 대학교에서 풍물동아리 ‘두레패’에 가입하면서 그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다시 이었다.
“당대 풍물의 대가로 알아주는 용인 한국민속촌의 정인삼 선생님을 찾아가 배웠어요. 정인삼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도 내 안에서만 배울게 아니라 내가 배웠던 방식 그대로 전국 타지를 떠돌며 각 지역의 대가들에게 사사받도록 하거라’라고요. 그래서 대전 무형문화재 1호였던 송순갑(꽹가리) 선생님과 충북무형문화재 1호였던 이종환(꽹가리) 선생님께도 사사받고, 김제, 부안에 가서 호남농악, 부산, 삼천포, 김천에 가서 영남농악, 동해안 후포에 가서 별신굿을 사사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고, 실천도 빨랐다. 군대가기 전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고, 군대도 육군본부 군악대 국악대에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이미 그는 군대가기 전 88서울올림픽 홍보사절단으로 미국 파견 공연을 갖는 등 재능을 인정받았다.
전통살리는 신명풍물예술단
23살의 나이인 90년 3월, 그는 신명풍물예술단(http://www.sinmoung.com/)을 창단한다.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보다는 ‘민족 정서의 고양’이라는 목적의식을 내걸고 창단한 순수문화예술단체였다. 순수예술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의미있게 만든 단체였다. 그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 사물놀이의 대가로 알려진 군북면 막지리 출신인 김덕수씨와 자주 만남을 가졌다. 둘은 옥천이 고향이라는 데에 동질감을 느꼈고, 사물놀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96년 그는 우리나라에서 사물놀이는 김덕수씨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 종합타악퍼포먼스로 방향을 선회한다. 하지만, 그의 풍물은 난타와 두드락, 도깨비 스톰 등의 타악퍼포먼스와는 엄연히 다르다.
“난타 류의 타악퍼포먼스가 다분히 연극, 개그, 오락적인 요소를 함유해 재미부분에 중점을 두었다면, 우리는 한국인의 전통문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연예가 아닌 진정한 예술이 무언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신명풍물예술단은 2000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타악기 페스티발에서 아시아대표로 당당히 출전하여 그랑프리를 거머쥐는 등 이젠 국내외에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도 1년에 연 80∼100회의 네덜란드, 프랑스, 일본 등의 국내외 공연을 소화하고 있다.
이런 그의 밑바탕에는 우리나라 각 현지를 직접 탐방하며, 사라져가는 농악을 되살려내고 자료로 복원하는 노력이 담겨 있다. 그는 이미 옥천에서도 청산면 지전리, 예곡리, 청성 농악 등 각 읍면 지역의 마을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세세한 농악을 체득하고 있었다.
이젠 먹고사는 문제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화두로 해야 한다는 그가 옥천을 품고 세계로 향하고 있다. 그를 만나려면 오는 9월14일 옥천체육센터 개관식에 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