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따듯한 인정미 (人情美), 품이 바다를 닮은 여인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따듯한 인정미 (人情美), 품이 바다를 닮은 여인
정여림 작가
  • 옥천닷컴 webmaster@okcheoni.com
  • 승인 2022.03.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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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리 류제순 1945년

젊은 날에 ‘나’는 없었다. 시집와 농사짓고 소 키우며 시 조카들까지 거두며 살았다. 지금껏 많이도 떼 내주고 살았건만 아직도 ‘내가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마냥 주고 싶다’는 어르신.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는 필자를 위해 복숭아를 깎아 쟁반에 담아 내 오셨다. “이것도 인연이야. 우리 집에 이렇게 들려준 것도 인연인데… 요거 먹고 가 응, 요거 더 먹어” 복숭아를 손수 포크에 찍어 코앞에 내미셨다. 출출하던 차에 얻어먹은 복숭아는 달콤했고 배 속도 든든해졌다. 그것은 비단 복숭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정 많은 여인이 베풀어 온 넉넉한 사랑과 베풂의 기운이 필자의 가슴 속까지 푸근히 들어와서 일 것이다. 

■ 경상도 남편, ‘나이 많은 사람한테 가면 호강 받는다’ 더니

고향은 충북 보은인데 고모가 중신해 여기 백운리로 시집 왔지. 시댁 일가는 원래 경상도에 살았는데 6.25 지날 무렵에 여기 백운리로 이사와 자리 잡았어. 영감은 일흔다섯에 먼저 돌아가셨어. 영감과는 10살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 돌아가신 지 11년 됐지. 옛날에는 부부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람이 많았어. 

나이 많은 사람한테 시집가면 귀여움 받는다고 아버지가 늘 말했었어. 고모도 나이 많은 사람한테 가면 호강한다고 나를 채근하더라고. 그런데 영감은 경상도 남자라 툭툭하기만 하더라. 옛날에야 뭐 다 그렇지. 지금 남편들처럼 조근조근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다툼 안 하고 산 것만도 행복한 거지. 술 먹고 때려 부수고 그런 남편들이 부지기수였거든. 다들 사는 게 팍팍하니 애꿎은 마누라만 괴롭히는 거지 다 안쓰러운 형국이었어.

나는 10남매 중 둘째였어. 시집올 때는 형제가 다섯이었는데, 시집오고도 엄마가 동생을 낳았어. 옛날에는 집집마다 줄줄이 사탕처럼 형제들이 많았어. 얼마 전에 동생 하나가 뭐가 급했나 예순 일곱인데 아파서 서울 대학병원 갔다 오더니 먼저 머나먼 그 강을 건너갔어. 형제 아홉이 똘똘 뭉쳐 살다가 하나가 먼저 가니 애간장이 끊어졌어. 마음에 부침이 커서 견뎌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

 

■ 깨 농사지어 송아지 한 마리 사…열다섯 마리까지

시집와 논농사, 벼농사했는데, 봄에는 보리 심고, 여름에 모심어 이모작 했지. 쉴 틈이 없이 그렇게 살았어. 참깨 농사지어 육만 원인가 주고 송아지 한 마리를 샀는데 그게 새끼 낳고 또 낳고 하여 열다섯 마리까지 늘었어. 송아지가 집안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어. 다 옛날 얘기야.

소 키우는 헛간이 저기 집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해서 두 개야. 여물 먹이고 볏짚 먹이고 산에 풀 베다 먹였어. 남편은 매일같이 풀을 많이도 베야 했어. 소를 먹이면 소 마구에 볏짚을 깔아 퇴비가 되니 논에 내어 땅도 기름졌어. 소 팔아 아들 집도 사줄 수 있었어.

옛날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소에게 먹였어. 우리 집은 우물이 멀어서 물지게로 지어다 날랐는데 겨울에 바케쓰에 물 담아 나르다가, 물이 떨어져 옷이 젖으니 얼어버려. 언 옷을 입은 채 물을 길어 날랐지. 소 한 마리에 한 바케쓰 씩 물 줬어. 딩기(등겨의 방언) 주고, 사료 주고, 여물 주고, 나락 농사지으니 딩기를 주었지. 

소는 많지, 해만 떨어지면 물 길어 날라야 해. 소죽도 끓여야 됐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 말도 못 하게 좋아졌지. 지금은 수도에 호스 연결해서 꼭지 틀면 바로 소 물 주더라. 일과가 소 아침 주고, 점심 주고, 저녁 주는 게 일이었어. 소 팔아 땅도 좀 샀지. 나중에 대구로 이사 가면서는 아들 집도 사줬지. 소 먹이는 게 힘은 들었어도 큰살림 밑천 이었어.

 

■ 시집오니 조카들이 오 종종… 정성껏 키워 줬어.

남편은 5남매 중 넷째야. 시집오니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신 지 3년 됐다 해. 그 손주 아들 둘, 딸 하나 세 명을 시어머니가 키우고 있어. 형님동서는 돈 벌러 멀리 갔고. 그러니 나도 내 자식처럼 키워야지 어떡하겠어. 나도 여러 형제 중에 컸잖아, 그러니 그런 마음이 생기데. 조카들이 중학교 갈 때까지 같이 살며 돌봤지. 속 섞인 건 별로 없어. 조카들이 내 말이면 끔찍이도 여겨. 

조카들이 나가서 싸우고 오면 남편은 “맞고는 들어오지 마라. 절대로. 치료비 물어주더라도 되니 기죽지 말고 살아라”라며 아비 없이 자라는 조카들이 마음이 아파서 더 엄하게 했지. 저희 엄마도 곁에 없으니 나는 감싸주고 싶었어. 시어머니는 그런 손주들 야단치고 했어. 형편이 그러니 속 안 끓인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옛날에는 다들 시동생도 키우고 그리 살았어. 그걸 고생이라 생각 안 해. 한 집 건너면 다들 비슷한 모양새로 그 시절을 살고 있었으니까.

 내가 서른 살 무렵, 대구 향촌동에 형님 동서가 식당을 하게 돼서 우리 부부가 도와주러 가서 3년 같이 살았어. 혼자 계시는 형수가 안쓰러워 애들 셋 공부 가르치라고 돈도 좀 해줬어.

나는 김천에 사는 쉰아홉 된 아들이 하나 있어. 대전서 공무원 하는데 며느리는 중학교 선생이고 남매를 두고 있어. 손주가 갓난아기 때는 내가 옥천에서 키워주었어. 나중에는 내가 김천에 가서 일곱 살까지 키워주었지. 손주가 일곱 살 되더니 대견하게도 ‘할아버지 외로우시니 이제 집에 가셔도 된다’고 해 옥천에 돌아왔어. 

요새 여자들은 편하게 살면서도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지. 자기들 하는 일들을 가만히 놔 둬야 하지. 우리 며느리는 나한테 참 잘해. 얼마 전에는 내 보약도 사 보냈어. 나를 생각하면서 보약을 짓는 그 마음이 고마운 거지.

 

■ 욕심내면 뭐해,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줄려고 해. 

그이는 약주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했어. 남편이 백운리 1반, 2반 반장을 했거든. 그 시절 동네 사람끼리 나이가 많든 적든 서로 이해해주고 재밌게 살았어. 보리밥 해서 같이 나눠 먹고. 그때 우리 부부가 주도해 동네 사람들 다 같이 관광버스 빌려 음식 준비해 같이 여행도 했지. 그 시절에는 1년에 한 번은 여행했어. 

서울 롯데월드, 부산 오륙도, 강원도 강릉…. 당시에는 내가 제일 젊기도 했고 우리 부부는 재미나서 신나게 그런 일을 했지. 인생 살아보니 좋다가 그만 끝나는 거지. 세상이 많이 좋아졌는데 아저씨가 더 살았으면 좋았지. 지금은 친정 형제들끼리 만나는 게 제일 좋아. 옛날에는 동네에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하나둘 요양 병원으로 찾아 들어가니 마음이 허허롭네.

요즘은 집에서 먹고 노는 게 일이야, 저쪽에 이사 온 사람이 ‘운동 갑시다’ 하고 찾아오면 같이 다니고. 새 친구가 생긴 거지. 서로 토닥토닥 해주면서 같이 늙어가는 거지, 저녁 운동 가서 여덟 시 반이면 돌아와. 시간을 놓쳐 드라마도 못 봐. 

좀 더 잘 살았으면 베풀면서 더 후하게 살았을 텐데. 더 못 줘 마음 아프지. 그게 아쉬움으로 남아. 갈 때는 빈손으로 갈 거잖아. 농사지으면 자식, 조카들, 손자까지 다 나눠 줘. 욕심내면 뭐해 갈 때 싸갈 것도 아닌 데.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줄려고 해. 

그동안 마음 아픈 일, 서러운 일 쌓인 것은 절에 다니며 스님께 위로받으며 살아냈어. 지나고 나니 인생이 허무해.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고 그 고단하고 힘겹던 시간들이 아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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