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석양보다 노을이 좋아
[어르신 생애사 연대기] 석양보다 노을이 좋아
이원면 정화순 어머니 1936년~
  • 김재희 작가 webmaster@okcheoni.com
  • 승인 2022.06.03 0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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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정지용문학관에 들렀더니 생가의 낮은 담장 밑으로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낮 달맞이 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품고 있는 색도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어서 더 고와 보인다. 정화순 어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 거짓말, 저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살이에요”

시집가서 이웃 형님들이 몇 살이냐 물으면 열아홉 살 이라고 거짓말을 줄곧 했다.

열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 입하나 덜겠다고 오라버니가 보낸 시집이라 더군다나 키 작은 내가 열다섯 살 때는 언뜻 보면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간다니 더군다나 신랑은 덩치가 산만했다. 초례상에서 나는 창피하기만 해서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첫날밤에는 신랑이 옆에만 오면 엉엉 울어대느라 새 신랑도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첫날밤도 결혼하고 여섯 밤을 지난 후에 치렀다. 남편이 점잖은 양반이라 나를 애기처럼 생각하고 존중해주었다. 

군대 생활 중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휴가 마지막 날 나는 남편의 여자가 되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데면데면 하다가 남편이 군대로 복귀 하는 날 어찌나 서운한지 마을 어귀까지 쫓아가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을 보내는 마음이 아니라 내 울타리가 되어줄 큰 오라버니가 떠나는 마음이었다.

경기도 연천으로 군복무를 하러 간 남편을 보내고 나는 시집에 홀로 남았다.

■ 아 가여워라, 가련한 생태계에 갇힌 여자들 

이제는 헛웃음만 나오는 시집살이 또 시집살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얄밉다고 했나. 고추보다 더 매운 건 시누이 시집살이였다. 남편은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어쩌면 그리도 매정한지...내 등에 누에를 넣는 건 예삿일이고 얼음 깨고 빨래해서 널어놓으면 숮검댕이를 마른 옷에 묻혀놓기가 다반사였다.

옆 동네로 시집간 시누이는 본인도 시집살이를 하면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다.

앙갚음을 나에게 하듯이...

우리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고, 다시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는 가련한 생태계에서 여자들은 살아왔다. 밭농사와 잠실을 하던 시댁이라 일거리가 너무 많았다.

잠자고 있으면 등 뒤에서 뭔가 꼬물꼬물 엉겨 붙는 느낌이 든다. 누에가 기어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까무라치게 놀랐지만 나중에는 귀여운 녀석을 손에 살며시 잡고 놓아주었다. 

■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하루 종일 새벽부터 집안 살림에 막내 시누 업고 우물물 길어오고 밭농사에 누에까지..

작은 몸으로 무쇠처럼 일만 했다.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한순간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삶에 유일한 희망은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도 나와 같은 고단한 시절을 분명히 보냈던 분인데 나를 예뻐하시고 귀하게 대접해주셨다.

항상 ‘우리 예쁜 아가야’ 라고 불러주셨다. 밥상에서 김치 한 젓가락이라도 꼭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셨다.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시할머니가 저승으로 떠나시던 날, 새벽 4시면 일어나시던 할머니가 기척이 없어서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면서 이승을 떠나셨다.

유일한 나의 희망이던 할머니 상여 뒤를 따르면서 피를 토하듯이 울었다. 

다시 남편이 제대를 하고 나의 희망이 되었다. 듬직한 사람이라 식구들 몰래몰래 나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던 건 남편이 꼭 잡아준 그 손이었다. 내가 그렇게 힘을 얻어서 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꼭 존댓말을 하고 손을 꼭 잡아준다. 스무 살 나를 붙잡아준 그 힘을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

6남매를 낳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여느 여자들과 비슷한 인생길을 걸었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듬직한 남편 만나서 마음만은 호강했다. 남편은 농사를 나에게 맡기고 청주로 나가 인쇄업을 했다. 나는 이원에 살고 남편만 청주로 나가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요즘 여자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말 부부 아니 월말 부부를 나는 50년 전부터 했다고 며느리들에게 웃으면서 얘기하곤 한다.

없이 살아도 정이 좋아야 한다. 여자들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하나면 고단한 일상을 다 잊을 수 있다. 어디 여자뿐일까, 남자도 마찬가지다. 

■ 인생에 정답은 없다

우리들은 80년 세월 속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아껴주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다정해도 우리 6남매 중 일류대 나오고 가장 넉넉한 아들이 이혼을 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아서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아들도 큰 사업 하면서 사회활동 하느라 집안 건사 안하고 오히려 며느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며느리도 사람인지라 20년 동안 외로웠고 남은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는 둘의 의견을 존중했고 지금은 서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어서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다. 숙제를 잘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인생과 타협하는 방법이다. 

나이드니 몸은 기력이 없어졌지만 길이 보인다. 간간이 30여년 써온 일기장을 넘겨보면 그 안에 이미 길이 나 있었다. 눈이 침침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기쁨이 있다. 나이를 먹어야 볼 수 있는 그것!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남은 여생은 그저 자애로운 할머니로만 살 것이다. 뜻대로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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