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발사였습니다.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소읍. 그는 아내가 있고 처남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아내는 소읍의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으며 백화점의 사장과는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발사입니다.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김춘수의 ‘꽃’처럼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몸부림만 떠오를 뿐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웬만하지 않으면 기억 속의 그들은 선생님, 세일즈맨 아님 곱슬머리 혹은 아! 조인성 닮은 그 애입니다. 이름은 날아가고 신체적 특징이나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만 남아 있습니다. (더러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 이름이나 성이 제멋대로입니다.) 이름에 대해 혹자들은 존재가 아닌 소유식 관계로 치부하여 이름의 무의미함을 역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연결 안되면 그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집니다. 들판의 이름 모를 꽃들도 이름이 접목되어야 기억의 한켠에 자리를 틉니다. 이름은 존재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기억의 금 밖에서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코엔 형제의 작품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우리가 이처럼 기억의 금 밖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시골 소읍은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신승수 감독의 <얼굴>은 소읍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완만한 시간에 갇힌 그들에게 정치적인 이슈나 개인의 가치적인 성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코엔 형제 작품 중에서 가장 내향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기존의 작품은 블랙코미디거나 다소 풍자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이번 작품은 존재론까지 파고 들어가는 묵직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주연배우 빌리 밥 손튼의 무표정한 연기는 변두리 읍내에서 희망없이 숙맥처럼 순하게 사는 이발사의 생활을 잘 표현했습니다. 사실 무표정 연기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는 않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탈론 같은 근육질이나 대사연기나 안되는 배우들에게나 통하는 연기지만 기능적인 연기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는 무표정과 침묵의 조화를 가장 잘 표현해낸 배우입니다. 뭉뚱그러진 슬픔이랄까. 두 작품에는 그런 슬픔이 짙게 베어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그의 내면에 갇혀 있는 자기를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존 영화에서처럼 자기 인식에 대한 거창한 몸부림이나 일탈에 대한 시도는 없습니다. 시도래봤자. 작은 가게를 마련하는 꿈이거나 그 소읍의 어린 처녀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는 겁니다.
이렇게 의사표현이 없는 그의 행동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는 모릅니다. 그는 단지 이발사이고 휴화산 같은 내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그는 대비책도 없습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보통명사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교풀 같은 희망, 되풀이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 그 속에서 우리는 일찌감치 거세해버린 욕망을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느와르 적인 배경에 완만한 진행이지만 긴장을 유지케하는 알 수 없는 속도감, 캐릭터들의 명암을 살려내는 흑백화면 등은 코엔 형제의 재능을 엿보게 합니다. 평단에서는 코엔 형제의 최고작이라고 하는데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단!! <노인의 나라는 없다> 전까지) 종전의 작품이 풍자에 주력하다보니 의미 전달에는 미흡했는데 이번 작품은 유머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보여주는 숙련된 작품을 보여줍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헐리우드 영화는 판타스틱이거나 블록버스터 아님 유치찬란한 희망을 보여주던 영웅주의류 작품이나 무리한 해피엔딩으로 분류 해놓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나 '매그놀리아' '아메리칸 뷰티'같은 작품들을 보면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아! 이들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긴 하는구나! 다들 사는 것 똑같겠지만 그늘이 없어 보이는 패권주의 미국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건 어쩔 수가... 마음의 삐딱함입니다. 암튼 코엔 형제나 마틴 스콜세지 같은 반골 기질의 작가들이 있기에 헐리우드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