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에 들어서면 복작복작한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을 반긴다.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전통시장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직 옥천에는 전통시장이 주민들의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시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대폭 줄었지만, 여전히 옥천 주민들이 찾아오는 식자재 상회가 있다. “내가 호박 10개 사가니까 남은 2개는 서비스로 줘요.”, “그래요.” 오고 가는 말속에서 정이 쌓이는 이곳은 남부상회이다.
■ 3대째 내려온 최대 식자재 상회
남부상회 사장 조영미(41)씨는 부모님께 가게를 물려받은 후 남편 하충오(40세)씨와 8년째 상회를 운영하고 있다. 남부상회의 역사는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희 친할머니가 옥천읍 마암리에서 남부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청과물을 18년 정도 팔았지요.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셔서 부모님이 이어 받았어요. 당시엔 1970년대 소도읍가꾸기, 새마을운동으로 집과 땅이 새 도로에 편입되면서 옥천올갱이 식당 앞 과거 시장터로 옮겨 남부상회를 하셨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30년간 운영하시다 어머니께서 허리가 아프셔서 제가 물려받았아요.”
그렇게 남부상회는 할머니부터 부모님, 조씨까지 3대에 걸쳐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남부상회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에는 100여 곳 이상의 식당에 육류·생선류·채소류·가공식품을 납품했다. 현재 식자재를 납품하는 식당은 40~50곳에 불과하지만 남부상회는 시장 내 최대 식자재 상회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남편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전 오정동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왔어요. 그리고 7시에 여기 도착해서 식당에 다 배달하고 나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겨우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었어요.”
■ 대전에서 옥천으로 다시 돌아오다.
조씨는 옥천에서 태어나 장야초-옥천여중-청주 소재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전 출신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조씨는 남부상회를 물려받기 전, 대전의 한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허리가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남부상회를 이어받기 위해 옥천으로 돌아왔다. 남편 하씨도 오정동에서 하던 중개업을 정리하고 함께 왔다.
사무직 노동자에서 시장 상인이 되는 것은 조씨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후회한 적은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게 장사라서요.”
그때부터 조씨는 새벽 4시에 출근해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을 한다. 김장철과 정월 대보름, 지역 특산물 출하 시에는 쉬지도 못하고 오후 7시까지 일해야 하지만 열심히 버텨냈다.
■ 가장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조달하다.
“우리 상회의 장점이요? 저희는 전날 밤에 선주문을 받아요. 그리고 새벽에 시장에서 제일 좋은 물건을 받아와요. 매일 신선한 재료를 식당에 배달하는 거예요.” 조씨는 선주문을 통해 수량을 파악하여 그날 사온 재료를 모두 소진한다. 그래서 매일 새로운 재료로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조씨와 남편 하씨는 양파와 감자를 재배해 봤기에 좋은 농산물을 보는 눈이 있다. 그래서 충북불고기, 초량순대, 안박사면옥, 토계촌 등 옥천의 다양한 식당에서 조씨의 안목과 성실함을 믿고 재료를 주문한다.
■ 전통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고 부흥을 바라다.
“시장이라고 하면 카드 사용이 어렵고 주차도 불편하고 위생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 가게 주인들이 더욱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카드 결제가 가능한 곳은 남부상회와 요거밸리, 그리고 반찬가게까지 3곳밖에 없다.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아 카드 결제기 사용이 불가한 것이다. 조씨는 만약 사업자등록을 하고 상인들이 자신의 사업이라는 인식을 하면 위생도 더 신경 쓰고 시장의 불편함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생각한다. 상인들의 주체적인 노력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전통시장을 기피할 이유는 없거든요. 마트보다 훨씬 싸요. 이윤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어요.”
조씨는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고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시장에 오길 희망하며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