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2)]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건 허물이 아니라 돌아보면 훈장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 (62)]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건 허물이 아니라 돌아보면 훈장
옥천읍 마항리 박 광 어르신(1942년~ )
  • 김경희 시민기자 psj@okinews.com
  • 승인 2020.12.2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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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없는 집에는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얼마 만에 눈살을 찌푸리며 햇살을 맞이한 건지 셀 수도 없다. 어르신 집 뒤로 키 큰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쭉쭉 뻗어 호위무사 마냥 어르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어르신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며 푸념대신 추억으로 곱게 싸맨 지난 시절 인연들을 꺼내놓으셨다.

■ 시대의 잔상들 

1942년생 보은군 삼승면 원남이 고향이다. 원남에 살다가 마항리로 시집왔으니 옥천 끝에서 끝으로 시집을 왔다. 6,25전에 능월초등학교 다니다가 전쟁 통에 공부 끈도 놓아버렸지만 살면서 얻은 경험들로 물리가 트였다. 6,25때는 청산까지 피난을 가보기도 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동네에 들어온 인민군들이 물 떠와라, 밥 내놔라, 총부리를 보여주면서 겁박을 했지만 큰 불상사 없이 그 험한 시절을 넘겼다. 9살 무렵이니 한창 겁 많을 때라 자다가 가위도 눌려봤지만 사람 죽어나가는 무시무시한 꼴을 눈앞에서 보지는 않아서 무사히 넘겼다고 위로할 수 있겠다. 

한적한 시골살이라 집안일 돕는 게 내가 밥 값하는 전부였다. 부모님 농사지으실 때 새참도 날라드리고 쇠풀도 뜯어 먹였다. 농사며 집안일에 내 손을 보태면서 큰 애기 시절을 보냈다. 시골 사는 큰 애기들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집올 때 가져온 재봉틀, 60년 친구다.

 

■ 베틀 만들던 아버지, 팥 각시 같던 어머니

부모님이 농사를 짓다가 베 짜는 틀을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그 놈을 팔러 상주며 경상도를 같이 돌아다닌 그 시절은 남달랐다.

아버지 함자는 박용하, 키가 작고 순한 양반이었다. 어머니는 조정자, 아버지보다 키가 컸던 여장부였다. 훤칠한 키에 미인이셨고 배포도 있던 분이라 팥 각시 같았다.

부모님이 베 짜는 틀을 만들어서 팔러 다니셨는데 나도 따라다니면서 장사하는 걸 어깨 넘어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길쌈이 생활의 큰 방편이라 아버님의 베 짜는 틀 제작 기술이 돈 벌이가 제법 됐다.  

아버지가 베틀을 등짐으로 지고 어머니와 나는 보따리를 챙겼다. 며칠 타지에 나가 숙식할 수 있는 채비를 보따리에 담아 가슴에 안고 아버지 뒤를 따랐다. 

탈것이 마땅치 않던 시절, 무작정 걸어서 상주까지 간다. 원남에서 보은 화령을 지나 상주까지 뚜벅뚜벅 걸어서 갔다. 새벽에 나가 저녁 무렵이 돼서야 우리가 그날 묵을 동네에 들어서면 남의 집 행랑채라도 얻어 하루 묵을 준비를 해야 한다. 

어깨가 빠질 듯이 무겁던 등짐을 벗어던지고 아버지는 한시름 놓으셨다. 그 사이 어머니는 행랑채를 얻고 저녁 끼니거리도 챙겨오셨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그 미덕이 바로 내조였다. 

땅거미가 금방 내려앉는 겨울이면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돼서 하룻밤을 지새울 집을 찾는 발걸음은 잰 걸음 일 수 밖에 없다. 그 시절에는 봇짐하나 매고 전국방방 곡곡을 돌면서 장사하는 봇짐장사들이 많았다. 저녁 무렵이면 시골 장터 옆 부락에는 장돌뱅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어느 집 행랑채를 얻어 하룻밤을 묵었다. 주인장 인심이 더 후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양푼을 들고 동네 이집 저집을 돌아 찬거리를 챙겨 와야 한다. 

타지사람이 모르는 동네 와서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밥을 얻어오는 일은 보통 얼굴 두껍지 않고는 못하는데 어머니는 그 일을 해내셨다. 어머니는 남편과 딸내미 먹이겠다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신다. 

애처로워 보이지만 그 시절 그저 평범한 어머니들이 살아가던 방법이다. 별 뾰족한 수가 없던 우리네 삶이 다들 그랬다. 그렇게 부모님은 땀 흘려 돈을 모아서 논도 사고 밭도 사 모았다.

지금 그 논밭이 어디 갔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저 지난일이라고 말하겠다. 부모님이 마련했던 땅뙈기들은 그 시절에는 다들 아들 몫이지, 딸 차지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시절을 탓할 수밖에.

아들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건사하면서 땅도 세월도 사그라들었다. 그 옛날이야 그저 집안의 대소사며 굵직한 돈벌이는 다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세상의 진리인줄 알고 살았다.

요즘 여자들은 우리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지만 미련스럽게 살았던 삶이 부끄럽지는

않다.

물론 자랑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거슬러 왔다.

그리움으로 남은 부모님.

■ 29살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앞만 보고 살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여인으로 살다가 21살에 마항리로 시집을 왔다. 중신애비는 먹고 살만하다고 늘 그러하듯이 달콤한 말로 혼담을 건네지만 막상 시집와보니 손바닥만한 방 한 칸 부엌 한 칸 짜리 집이었다. 지금 지붕이며 안채 넓힌 것도 남편 먼저 떠나보내고 내가 벌어서 살만하게 하나씩 고쳐나갔다.

시집와서 이집에서 60년이다. 남편 떠나보내고 50년이다. 남편은 나와 8년 남짓 살고 먼저 훌훌 떠나버렸다. 내 나이 스물아홉 살, 남편나이 서른네 살에 허망하게 떠나고 말았다. 남편은 옥천 건설경기가 좋을 때 모래 퍼 나르는 트럭을 운전했는데 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우리 얼굴도 못 보고 떠난 안쓰러운 사람이다.

그때 우리 큰아이가 6살, 작은 아이가 4살 이었다. 서울 시숙이 아이가 없어서 우리 큰 아들 키운다고 큰아들과 내가 서울 불광동 시숙 집에 올라가 있었다.

아침밥상 물리고 나서 집배원이 찾아왔다. 집배원은 전보를 먼저 확인하고 오던 길이라 얼굴빛이 안 좋았지만 나는 정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전보를 꺼내더니  “박광씨 앞으로 왔네요.” 한마디 건네며 휭 하니 가버렸다. 나는 전보를 보자마자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던 다섯 글자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서정운 사망’

6살 먹은 석태가 뭘 알기나 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이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석태 6살 석영이 4살 때였다. 29살, 서른이 되기도 전에 나는 두 아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왔다. 이제 남편의 그늘은 없어졌다. 아이들을 건사하고 살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온전히 나 혼자 만의 일이었다. 내 슬픔을 세상이 알아 줄 것도 아니며 나는 그저 내 길을 걸어야 했다.

젊은 날 내 삶의 동력이던 두 아들.

■ 알토란같은 마항리 여인들

마항리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해서 우리는 새댁 때부터 같이 먹고 살 거리를 찾아 나섰다.

아침이면 골목 어귀에 모여 산 넘어 나무하러 다녔다. 여자들이 다 억척스럽게 살림을 일궜다. 우리는 전우들이다. 생활 이라는 전쟁 통에서 살아난 전우들이다. 

새벽에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서 나뭇가지들을 꺾는다. 이리저리 손은 손대로 긁혀가면서 퇴침마냥 동그랗고 짱짱하게 묶는다. 발로 꾹꾹 눌러서 소담하지만 꽉 들어차게 묶는 것도 기술이다. 어깨에 척 둘러매면 몸이 기우뚱하지만 다리에 힘 바짝 넣어서 중심잡고 그길로 산을 내려온다. 

무슨 힘으로 어떤 정신으로 그 무거운 걸 둘러매고 마을까지 왔는지...지금시간으로 따져보면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걸어왔다. 그것도 맨몸으로 걸어도 힘에 부치는 거리를 나무등짐을 매고 온다.

고구마라도 삶아갔으면 또 몰라. 점심도 아까워서 빈속에 나무 짐을 하고 점심이 지나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부엌 아궁이에서 찬밥을 찾아 물에 후루룩 말아먹고 다시 밭 매러 호미 들고 나갔다. 일하러 태어난 사람들처럼 하루 종일 밭 매고 나무 짐하고 그렇게 사는 게 삶인 줄 알고 살았다.

대전 인동 아이스깨끼 공장에도 다녀보았다. 아침이면 공장에서 차가 와서 우리 마을 아낙들을 데리고 간다. 우리는 그 차에 몸을 싣고 출근을 해서 그 작대기를 꽂은 아이스깨끼를 만든다. 그 시절 누군가 어깨에 양철통을 메고 다니며 “아이스깨끼”를 외치던 그 아이스깨끼를 우리가 만들었다. 그 얼음덩어리를 한 번 먹어보겠다고 아이들은 아이스깨끼 장사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지금처럼 생크림이 어디 있고 온갖 치장을 해댄 아이스크림을 상상으로 그려보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대전 가수원 넘어 진잠에 있는 통조림 공장에도 다녔다. 공장 인력이 없어서 옥천까지 와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복숭아 간소매 공장 이었다. 황도와 백도가 설탕물에 푹 담긴 그 복숭아 간소매가 그 시절에는 명약이었다. 피곤해도 한 입 떠먹으면 씻은 듯이 낳았고 속이 더부룩할 때 먹어도 체증이 훅 내려갔다. 그 설탕덩어리가 뭔 특효가 있었을까. 그저 먹거리없던 그 시절에 혀를 달래주던 그 맛에 모두 혼을 뺏긴 것이다. 다 마음먹기라는 거다. 그 때가 50대 초반이었다. 나도 산업역군으로 한 몫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반증이다.

지금은 시니어클럽의 9988 사업으로 동네 다른 이와 2인1조가 되어 동네 사람들 8명의 안부를 챙기고 있다. 나보다 형님도 있고 나보다 어린 몸이 불편한 동생도 있다. 가사 일을 돕지는 않지만 집에 가서 말벗도 되어주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준다. 9시에서 12시 까지 집집마다 방문한다. 아직 내 다리가 튼튼해서 돌봄 대상이 아니라 챙겨주는 이로 출근할 수 있어서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 햇살 가득한 양달 집

혼자 남아 어린 두 아들을 바라 볼 때는 빨래 방망이라도 실컷 두드리며 시름을 달랬다. 젊은 나이라 새 출발 하라며 부추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 석태 석영이 보면서 하루하루 살아왔다. 후회가 없는 것 보니 내 나름으로 자립해나가며 하나하나 일궈가는 인생도 가을걷이 끝난 들판처럼 소담스러웠다. 

80넘으면 다 소용없다. 덜 아픈 사람이 양반이다. 우리는 고생하면 살았어도 좋은 세상 구경은 하지만 우리 어머니들은 좋은 세상을 꿈도 꿔보지 못하고 살다 가셨다. 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건 허물이 아니라 돌아보면 훈장이었다. 부모님을 위해  자식을 위해 살아왔고 이제는 오롯이 나를 돌보는 시간을 만났다. 동무들과 서로 안부를 챙기고 뒤꼍의 키 큰 소나무들이 떠 버티고 나를 지킨다. 이 강추위에 한낮의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시는 양달 집에 살고 있다. 지금 내 삶이 양달이다. 이만 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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