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월에 바빴지 지금은 한가해요”
동이면 세산리에서 캠벨포도밭을 운영하는 임근재(75), 정난순(71) 부부는 아침 6시부터 나와 하우스를 지켰지만 손에 잡히는 일거리는 딱히 없는 모양이었다. 바닥 위로 듬성듬성 튀어 올라온 풀을 뽑고, 포도 알이 실팍하게 자랄 수 있도록 남은 잔알들을 빼내고 나서 임근재씨는 “오늘 작업은 이만하면 됐다”며 간이식 휴게 공간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3~5월에 흘렸던 땀방울이 결실로 맺어지는 수확기 7월까지 알들이 보기 좋게 잘 크는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임근재씨는 “이제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라며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 ‘서울 살이’만 53년... 이만하면 내려올 때 됐다 싶어
지금 임근재씨는 귀농귀촌인연합회 옥천읍 회장을 맡고 있다. 동이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임근재씨는 젊은 시절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떠났다가 2015년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배우자인 정난순씨는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나 친척에게 한복 제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가 남편을 따라 옥천에 왔다. 둘은 1972년 서울에서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악착같이 살았다. 정난순씨의 말 그대로 맨손으로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 쓰고 안 먹어야 했다. 처음 둘은 삼립빵 대리점을 운영하다 10명이 넘는 인력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되자 문 닫고 곧장 신발 장사에 뛰어들었다. 용산구 재래시장인 용문시장에 상가를 하나 얻어 장사를 시작했는데 신발 장사도 생계에 큰 보탬이 안 됐던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쑥쑥 커가는 아들 둘까지 옆에 있다 보니 보다 큰돈을 만져야 했다. 신발 장사를 접고 우연히 그 자리에 차린 ‘닭집’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줄 둘은 몰랐다.
“우린 IMF도 피해갔지요” 임근재씨가 말했다. IMF사태 직후 주변 상인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때 시장 바닥에서 건사했던 집은 오로지 이 부부의 닭집이었다. 임근재씨는 생닭을 음식점에 납품하는 배달을, 정난순씨는 상가 앞에 마련된 가마솥에서 통닭을 튀기는 일을 했다. 그 때 바짝 모은 돈으로 두 아들의 신혼집을 마련해주었고, 대방동에 부부가 머물 집도 구했다. 부부가 옥천으로 내려온 지금, 그 닭집은 둘 째 아들이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룰 것 다 이루고 내려왔네요?’라는 질문에 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지난했던 ‘서울 살이’에 상한 몸과 마음, 치유 방법 찾고 싶어
‘서울 살이’는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증표는 몸에 상처로 새겨졌다. 정난순씨는 옥천으로 내려오기 직전인 2014년 간암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오랫동안 서서 장사를 하다 보니 하지정맥류도 생겼다. 이 부부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다행히 지난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정난순씨는 “스트레스성이었대요. 서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만나다보니 힘들었나 봐요”라고 밝혔다.
임근재씨에게도 서울은 경제적인 부를 안겨준 곳이지만, 마냥 고맙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서울의 북적북적한 지하철이나 버스, 도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숨이 턱턱 막혀요. 그런데 옥천은 도로가 잘 뚫려있어서 마음이 얼마나 편해졌는지…”라고 귀농 생활에 십분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 날부터 밥벌이에만 매달리느라 이제야 맞이하게 된 삶의 여유를 이곳 옥천에서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귀농을 하고 나서는 봄, 가을에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국내 여행은 물론 태국,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이탈리아까지. 특히 임재근씨는 “여행을 다니면서 그 나라, 지역의 생활습관들을 유심히 지켜봐요. 맛이 가지각색인 음식들을 즐기는 것도 좋아하고요”라며 여행에 푹 빠지게 된 배경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여행길은 항상 정난순씨와 함께 한다. 정난순씨는 “남편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가끔 피곤할 때가 있지만, 이제야 조금씩 다니기 시작한 여행이 좋긴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 텃밭 만들려다 1천평 밭으로... 만만치 않은 귀농 생활
사실 둘은 옥천으로 내려오게 되면 자그마한 텃밭 정도만 가꾸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간 억척스럽게도 살아온 몸의 관성이 작용한 탓이었을까. 막상 내려와서 보니 내가 먹을 만치만 키우기엔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부부는 400평의 캠벨포도밭 외에도 벼, 옥수수, 고추, 상추, 호랑이콩 등의 작물을 심은 600평의 밭도 가꾸고 있다.
다작은 아니지만 공들여 키우기 딱 좋았다. 캠벨포도 수확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지금처럼 수입이 없을 때를 대비해 여러 농작물들을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임근재씨는 “로컬푸드직매장이 참 고맙지. 우리 같이 농작물을 조금씩 키우는 사람들도 받아주니까”라고 말했다. 한편 옆에 있던 정난순씨는 “서울에서 장사하는 것보다 농사일이 훨씬 힘들게 느껴져요”라며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귀농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드러냈다.
하지만 앞으로 부부는 샤인머스켓에도 손을 대볼 예정이다. 부부가 키워온 캠벨포도나무 아래에는 샤인머스켓 새 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6년간 쌓은 포도 재배 경력으로 올해부터 겸작을 시작해 내년엔 샤인머스켓을 수확해보려 한다. 임근재씨는 “샤인머스켓이 캠벨포도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에요”라면서도 “그런데 한 번 시도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많은 작물을 키우고 있는 실정에 한편으로는 걱정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하우스 한 편에 걸려있는 부부의 빼곡한 영농일지를 보면 못할 일만은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