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9월부터 사회복지사로 바하센터에서 일하는 이지숙(35, 읍 문정리)씨도 그랬다. 기업의 안전관리 일을 꿈꾸던 그는, 발달장애를 앓는 두 형제를 맡고자 후자를 택했다.
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보람을 얻었고 깨어나게 되어 좋다고 말한 이지숙씨. 그는 중증 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서 야간 활동보조서비스와 중증장애인을 위한 교육·주거시설, 장애인 가정과 관련 기관의 연계를 강조했다. 그리고 발달장애인 가족 중 수직 관계인 ‘부모와 자녀’만큼 수평 관계인 ‘형제자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이지숙씨를 옥천신문사 2층에서 만났다.
■ 중증 발달장애 앓던 그의 동생 지선씨
청성면 대안리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난 이지숙씨. 그의 어머니와 동생 지선(33), 성복(30)씨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성복씨는 고등학교도 졸업한 만큼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선씨는 어릴 적부터 말을 하지 못했고 종종 울었다. 변을 못 가렸고 때때로 밤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렇듯 ‘이상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선 의무교육과정도 거치지 않게 했다. 동네 어른들은 ‘좋아질 거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지선씨는 가둬진 채 자랐다. 그러다 10대 후반부터 시설에 보내졌다. 20대부터는 옷을 벗는 버릇이 심해져, 10년 전쯤 시설에 있었다. 어느 시설에선 항상 묶여 있어서 몸에 욕창이 생겼다.
그동안 기존 증상과 옷을 벗고 타인을 때리는 행동은 계속됐다. 면사무소나 군청에 가서 이걸 알렸고, 사회복지사가 지선씨를 맡았다. 하지만 다들 그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해 담당자가 열 명쯤 바뀌었다. 시설도 감당하지 못해 종종 퇴소 처리됐고, 옥천 사회복지 쪽에서 지선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선이가 어렸을 땐 다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교육적인 부분이 그랬어요. 특수학급도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의무교육대상이었을 때 누구도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 부분을 많이 놓친 것 같아요.”
■ 작년 9월부터 삶이 바뀌다
그러다 전화가 걸려왔다. ‘지숙이 얼굴 좀 보고 싶다’는 옥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신봉기 센터장의 연락이다. 그는 동생 성복씨가 종종 센터에 찾아와 상담하면서 지선씨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리고 지선씨와 같이 식당으로, 센터의 가족여가지원사업으로 울진 앞바다에도 갔다. 그를 만나며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여태껏 못했던 일을 시작했어요. 그동안 제 동생은 그런 걸 못할 거라고, 그런 게 안 되는 애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시도를 안 했던 것뿐이에요. 말을 못 할 뿐이지, ‘뭐 가져와 줄래?’라고 말하면 그걸 다 해요.”
옷을 아예 싫어했던 게 아니었다. 예쁜 걸 입으면 좋아하는 자기 취향이 있었다. 예뻐하는 옷과 신발, 가방의 가짓수를 늘려줬다. 밖에 나가면 옷을 입도록, 제때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일상생활훈련을 도왔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훈련한 대로 잘 행동한다고. “20대에는 저도 몰랐고, 아무도 이런 걸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힘으로, 강압적으로 옷을 입혔어요. 지금은 이 아이의 생각에 맞춰 ‘어디 가려면 옷을 입어야 해’라고 접근해요.”
그동안 사회복지사들도 지선씨의 일로 언니 지숙씨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잘 지내시죠?’와 같은 안부 인사뿐이었다. 그러나 신봉기 센터장은 그와 상담을 진행했다. 사회복지사가 동생 일로 서로 얼굴을 보며 상담한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의 비장애인 형제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신봉기 센터장은 그에게 동생들을 돌볼 수 있도록 그에게 사회복지사의 길을 알려주었다. 부모님은 연세로 지선씨와 성복씨를 돌보기 어려워졌다. 아예 돌볼 거면 사회복지사로서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는데, 제 삶이 해야 하는 쪽에 가까워서 그렇게 됐죠.”
■ 발달장애인 동생들을 위해 사회복지사 되다
작년 10월부터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고, 두 동생은 12월부터 바하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부터 4개월 반 동안, 이지숙씨는 읍 문정리 집에서 지선씨와 함께 살았다. 동생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고, 여러 행동으로 민원도 들어왔다. 잠을 못 자다 보니 예민해지고 우울해졌다. 그래서 동생과는 일주일에 1~3번만 혹은 낮에만 함께 있었다. 이렇게 올해 9월부터 사회복지사로 바하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앞으로는 청소년 발달장애인 방과후활동서비스를 주로 담당할 것 같아요. 가족이 가족을 돌보는 건 원래 안 돼요. 지선이가 돌발행동할 때 너무 급하면 제가 가서 제지해요. 대신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뭘 하는지 다 듣고, 지선이 컨디션이 좀 안 좋다 싶으면 시간(성인의 경우 오전9시~오후5시까지다) 중간에 같이 나오죠.”
이지숙씨가 바하센터에서 일하며 느낀 점은 ‘이렇게 장애인이 많았구나!’였다. 장애인 가족이 세 명이나 있는데도,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애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애인들을 살리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제때 적절한 개입으로 최대한 자립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의미예요. 그걸 생각하면 보람찬 일이죠.”
■ 이지숙씨가 느끼고 바라는 것
사회복지사로 산 지 한 달 반밖에 안 됐기에, 이지숙씨는 스스로 발달장애인이나 중증장애인에 대해 모르는 점도 많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언제나 전문적으로 자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매번 충북장애인부모연대와 가족지원센터에서 자문받고 있지만, 직접적인 행동 중재에 대한 인력 부족을 느끼고 있어요. 활동지원사나 바하센터 사회복지사만으로는 행동 수정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충북대학교병원에서 진행 중인 행동 중재 솔루션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으면 합니다.”
지선씨와 같이 살았을 때, 공부할 때나 일하고 집에 오면 지치다 보니 동생을 돌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야간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했는데 옥천에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 청성에 사는 동생들이 바하센터로 올 땐 성복씨가 지선씨의 보호자 격으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는데, 동생 지선씨의 행동들로 연락이 왔다. 이런 행동은 주의해달라고.
“지선이의 경우가 되게 심각해요. 20대 후반에 중증장애인 시설에 보내려고 전국에 연락했는데, 어떤 곳에선 ‘장애가 너무 심해서 입소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할 정도였어요. 경력 많은 여러분들이 맡아야 해요. 그러려면 군내 인력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지선이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적인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어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많이 바뀌다 보니까.”
지선씨를 위한 특수교육도 필요하다. 이지숙씨는 바하센터에서 사회복지사가 하는 교육보다 순회교육(직접 방문으로 진행되는 특수교육과정)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옥천에서 순회교육을 받으려면 교육기관 혹은 시설에 입소해야 하고, 그러려면 바하센터의 성인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지선씨는 고향 집에서 살고 있고, 이지숙씨는 여건상 주말에만 고향으로 간다. 유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주거·교육 시설도 있으면 좋겠어요. 탈시설과 자립이 목표지만, 갑자기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린 시절에 지선이를 떠올리면 항상 웅크려 있었던 모습이었어요. 지금 떠올리면 참 외로웠겠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렇게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있다. 이지숙씨는 그런 사람들을 발굴해서 기관과 연계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9월 기준 군내 발달장애(지적장애·자폐성 장애)를 겪는 사람은 589명이며, 현재 바하센터를 이용하는 발달장애인은 28명(성인 14명, 청소년 14명)이다. 바하센터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043-732-2111, 010-6378-2111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