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이주여성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이주여성 ‘친구’들과 함께라면
옥천결혼이주여성협의회 네팔 국가 대표 구릉소니(31)
일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이주여성의 삶
  • 이상현 인턴기자 webmaster@okcheoni.com
  • 승인 2021.11.04 2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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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온 청년 이주여성 구릉소니 씨.
네팔에서 온 청년 이주여성 구릉소니 씨.

“처음 옥천에 왔을 때 등산가자고 해서 제가 ‘산이 어딨는데요?’ 하면서 놀렸어요. 네팔에서 저렇게 낮은 건 산이라고 안 불러요. 저희 동네에도 저런 언덕들이 많았는데 산이라고 안 불렀거든요.”

네팔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7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온 구릉소니(31, 읍 가화리). 그는 재밌는 청년이자 이주여성이었다. 그의 인생은 흔히 노출되는 ‘수동적인’ 이주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남편이 네팔에 처음 왔을 때 만나게 되어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뒤이어 말했다. “못생긴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했다가 남편과 계속 페이스북(소셜네트워크)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마음이 열렸다. 결혼을 결심하고 7년 전 처음 한국으로 왔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있던 울산이었다. 거기서 울산대학교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젊은 나이에 시작한 시집살이와 타국 생활이었다.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와서 “하루 종일 인사만 했다”. “적어도 저희 집은 자주 보는 가족끼리는 인사는 하루에 한 번만 했거든요. 근데 여기 오니까 어른들한테 나갈 때 인사하고, 들어와서 인사하고, 계속 인사만 했어요.” 식문화도 힘들었다. 네팔에서 즐겨먹던 닭고기에 비해 한국 닭은 맛이 없었다. “네팔에서는 토종닭을 먹었어요. 근데 여기 와서 마트 닭을 먹었는데 맛이 없더라고요.” 된장찌개도 특유의 냄새로 먹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먹고 살 만큼’ 한국 요리를 할 줄 안다. 그는 또 한 번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잘하지는 못해요. 딱 먹을 만큼만 해요.”

 

■ 친구들을 만난 옥천

옥천은 그에게도, 남편에게도 연고가 없던 곳이었다. 남편이 지리산고등학교(경남 산청군)에 있을 때 제자였고, 남편과 연결을 시켜준 사촌오빠가 도립대를 나와 옥천에 살고 있었다. 든든한 오빠가 있다는 사실만 믿고 4년 전, 옥천으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올라왔다. 

대도시에 살다가 올라와서 그랬을까. 처음 만난 옥천은 ‘시골’이었다.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옥천에서는 외롭지 않았다. “여기 와서 다문화센터에서 수업도 듣고, 결혼이주여성협의회에도 참여하면서 친구들을 만났어요.”

그는 결혼이주여성협의회에서 네팔 국가 대표를 맡았다. 남편 김원희(44) 씨는 구릉소니씨의 협의회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 김원희 씨는 아예 협의회 자문 위원을 맡았다. “저는 사실 집에 있는 게 좋을 때도 있거든요. 집에서 넷플릭스로 인도 드라마 보면서 놀아요. 그런데 남편이 항상 협의회 행사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오라고 말해요.” 

구릉소니씨의 집은 네팔인들의 만남의 장소다. 주말마다 옥천에 사는 네팔 이주여성 2명과 남성 이주노동자들이 집에 모여 네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몇몇 남편들은 남자인 친구를 부르면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제 남편은 오히려 ‘불러 불러’하고 말해요. 남편도 제 친구들하고 다 알고 친하게 지내요.”

 

■ 일하고 목소리 내면서 살아간다

구릉소니씨는 꾸준히 일하는 이주여성이었다. 교동식품에서 알바도 하고, 진영포장산업(동이면)에서 저번달까지 일했다. “포장작업을 했어요. 선별,포장,벤딩까지 해서 무거운 걸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2년을 일했어요.” 다음 주부터는 엠케이메커닉스(옥천읍)에서 일한다. 여성회관에서 연결해준 일자리다.  

계속 노동을 해왔지만 이주여성 일자리 문제는 그에게도 큰 문제로 다가온다. “이주여성은 일자리 찾기가 힘들어요. 고용노동부나 여성회관에서 일을 연결 안 해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옥천 생활을 말하면서 계속 웃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주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말하기 시작하며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구릉소니씨는 또 아이들 교육의 어려움을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도 학교에서 나오는 안내문을 읽으면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안내문을 남편한테 보여주면 남편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할 때도 있어요. 다른 이주여성 남편들 중에는 글을 못 읽는 경우도 있어서 큰 문제죠.”

그래도 구릉소니씨는 “이주여성협의회가 있어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이주여성협의회에서 하고 싶은 일로 ‘쉼터’를 꼽았다. 

“한국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 집이라도 가잖아요. 근데 이주여성은 친구한테 가고 싶어도 친구 집에서도 싫어해요. 너 이런 사람이랑 친구 하냐, 너도 얘랑 놀다가 나중에 나가면 어떡하냐고 그런 말도 한다고 해요. 또 시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이주여성도 많잖아요. 이주여성들이 본인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는 쉼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다

구릉소니씨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아이가 다 크면, 남편과 함께 네팔로 돌아갈 계획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고민 중이에요. 네팔 국적을 포기하는 게 쉽지도 않고, 또 국적을 꼭 따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네팔에서도 살고, 여기서도 살고 싶어요.” 또 다른 바람은 아이와 함께 네팔에 가는 것이다. 이미 간단한 단어 정도는 익힌 네팔어도 아이가 배우고 싶어한다면 가르쳐주고 싶다. 

비록 옥천에는 부족한게 많지만,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옥천에 있다. “옥천이 시골이라고 해도 친구들이랑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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