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송인택 1940년생
“여보 나와 봐요 어여 나와 봐요”
슬며시 문을 열고 평상으로 나오시는 송인택 어르신.
수줍은 미소까지 머금고 계신 이유였을까? 잘생긴 어르신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다,
여장부이신 사모님이 “남편은 하늘이야” 라고 하시며 남편의 앉는 자리까지 챙겨주신다.
불타는 청춘일 때는 상남자로 호령하셨겠지만 이제는 사모님의 든든한 수행비서가 되신 어르신. 월남전에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연일 악몽을 꿔보기도 하셨고 군에서도 장기복무 하시며 상사로 제대하셨다.
이제 담장 낮은 집에서 사모님과 두 분이 알콩달콩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앗, 텃밭의 아이들까지 식구들은 제법 된다. 새벽마다 물 주고 풀 뽑아주고 정성을 들여야 텃밭의 아이들도 쑥쑥 자란다며 자식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 마디 더 보태셨다. 자식 이야기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오셔서 홍두깨로 칼국수를 밀어주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하늘 한번 쳐다보신다. 한참을 올려다보시는 이유는 분명 눈물이 떨어질세라 고인 눈물을 가득 안고 계셨다. 하, 이상도하지, 할아버지들의 눈물은 유난히 가슴을 저민다.
이제 나의 벗들은 아내 그리고 텃밭의 살가운 녀석들
나이 들면 잠도 없어져 동트기 전에 눈이 떠진다. 아내도 부시럭 거리는 걸 보니 잠에서 깬 모양이다. 슬그머니 일어나 할 일이 없어도 뒤꼍 텃밭에 나가 새끼 같은 녀석들을 살핀다.
내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라주는 녀석들. 말대꾸 안하고 잘 자라주니 어쩌면 더 살가운 녀석들이다. 그 하늘하늘한 줄기로 비바람을 다 막아내면서 살아내는 것을 보면 큰 소리만 치는 우리 남자들보다 갑절은 낫다.
한마디 아우성도 없이 말이야.
자칫 쓸쓸할 뻔 했던 나의 노년을 아내가 따뜻하게 위로 한다. 나보다 목소리는 더 크지만 그 쩌렁쩌렁한 소리가 잔소리가 아닌 위안이 된다. 늙는가보다 아니 늙었다.
나도 육군 상사로 제대하고 월남에도 다녀왔다. 사나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본 세월이 수십 년은 족히 된다. 월남에서 죽을 고비도 넘겨보았고 죽어가는 전우들도 보면서 악몽에 사달려 보기도 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도 살아남았다.
지금의 평안이 그 회오리바람 후에 찾아온 고요인데 그 철벽같은 남자의 마음도 ‘어머니’라는 말 한마디면 와르르 무너진다. 태풍에 흙담 쏟아지듯이 말이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한가득 고인다.
진안이 고향인 나도 여느 촌부들처럼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소쿠리 장사 하면서 5남매를 먹여 살리셨는데 그 소쿠리 하나 팔아서 몇 푼이나 남았을까.
머리에 잔뜩 이고 5일장을 돌아다녔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훔치는 마음 여린 사내이기도 하다.
진안초등학교 5학년 다닐 때 6.25가 났다. 우리 진안 용담 사람들은 피난처를 따로 구하지 않고 동네에서 전쟁의 시간을 보냈다. 장남인 나는 부모님께 못해드리고 동생들 잘 챙기지 못한 시절이 야속하다. 인돈이 인표 순이 예숙이 얼마 만에 불러보는 동생들 이름인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아내가 홍두깨로 밀어주는 칼국수 한 그릇에 속까지 뜨끈해지는데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그 칼국수 맛은 따라올 수가 없다. 그 시절의 칼국수가 양념이 제대로 배이기를 했나 고명이라도 얹어 올릴 것이 있었나.
그저 손으로 쑥쑥 밀어 한 가닥 한 가닥 도마에 툭툭 쳐가며 말아먹은 칼국수인데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후루룩 소리 내면서 먹었지만 지금 기억되는 그 맛은 짭조름한 어머니 손 때 묻은 맛이었을 거다.
혀로 기억된 맛이 지금도 생각나서 추억이 되었다. 5남매가 나눠먹느라 젓가락 부딪치며 소란을 피웠다.
지금 아내가 매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에 된장찌개며 생선구이에 돼지고기까지 볶아 올려주면 감읍할 따름이다.
장독대에 두둑이 들어있는 고추장 된장이 살림밑천인양 까르르 웃어대는 아내가 내 삶의 윤활유이다.
진안에서 먹고 살길이 보이지 않아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가 24년 전 옥천으로 이사를 왔다. 은진송씨 집성촌에서 살다가 아내 고향으로 와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육군 상사로 제대를 하고 사회에 막 나왔을 때 친구가 대전 라쌍떼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백화점이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대전에서 패션 백화점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친구의 소개로 백화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상장도 제법 많이 타고 인정 많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내가 백화점 다닐 때도 아내는 내조를 잘 했다. 백화점이 여자들이 많은 곳이라 입성 좋게 다니라고 옷매무새를 잘도 챙겨주었다. 남편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가 다른 여자들한테 눈길 받으면 어쩌나 신경전을 벌이기보다 남편이 멋져 보이길 바란 아내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늘 고마운 사람이다. 나도 그때는 거울 앞에 서면 제법 근사했는데 지금도 간간이 젊어 보인다는 말에 내심 기분 좋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생활 시작했다가 월남 키난(구술대로 표기)으로 자원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죽을 고비를 나도 넘겼고 밤이면 폭죽처럼 터지는 총소리에 귀가 잘 안 들리게 됐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사단 수색중대 사령부 안에서 근무했다. 전쟁터가 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이지만 그나마 배고픈 고통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베트콩이 죽창으로 어느 군대를 어찌 했다느니, 밤새 어디가 몰살됐다느니
매일 심장이 쪼그라드는 소리만 들었지만 무사히 살아돌아왔다.
김추자 가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전쟁터로 나를 떠나보낸 부모님은 하루도 마음 편히 못 계셨을 터인데 살아 돌아와서 큰 시름을 내려놓으셨다. 다들 같은 마음이라 김추자 가수의 노래가 대단한 인기를 몰고 왔다.
젊은 날의 상흔, 측은지심으로 느지막이 만난 우리
나도 사별한 아픔을 지나 혼자 살고 있었고 아내도 혼자였다. 24년 전 지인이 중신을 서고 인연을 맺었다. 둘 다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안쓰러워 하면서 보듬었다.
아내가 금산장에 농사지은 더덕이며 농산물을 내다 팔고 있어서 마침 차가 있던 내가 실어다주면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정이 들었다.
사람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우리 부모님은 장수하셔서 아버지는 96살에 어머니는 86살에 돌아가셨다.
아내가 두 분을 다 보내드렸다. 장남 노릇을 하게 해준 아내한테 고맙고 또 고맙다.
아내도 혼자 살아내느라 힘들었지만 결국 잘 버텼고 지금은 나와 함께 등 긁어주면서 해로하고 있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내 몸을 편히 누일 곳 걱정이 없으니 더 이상 무얼 바랄까.
키 작은 예쁜 꽃들이 사계절 알아서 피어주니 눈까지 호강을 한다.
나라에서 수고했다고 매달 군인 연금까지 따박따박 통장에 넣어주고 살림꾼인 아내한테 다 맡겨놓으니 든든하고 손갈 일이 없다.
물론 돈 줄을 쥐고 있어서인지 큰 소리 종종 치는 아내지만 그 큰소리가 안 들리면 나는 어찌 살까.
힘없는 노인으로 전락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벗이 없어지는 허망함이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맴돌아 아내는 두툼한 이불을 꺼내놓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챙겨주는 아내가 있어 나는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팔자 좋은 남자가 되었다.
지난날의 상흔들이 뼈아픈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남게 되어 내 인생이 허허롭지 않다. 인생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지나온 길은 우여곡절의 꾸불꾸불한 길이었지만 이제 얼마나 더 걷게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길은 신작로다.
누군가 딱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고 야멸차게 말한다면 사방천지가 단풍으로 물든 이 눈부신 계절을 내년에도 아내와 함께 마중하고 배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