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_ 경북 문경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진로에 대한 고민이 크지 않았다고 전했다.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나는 당연히 사회복지사가 될 거야”라는 어렴풋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본인 만의 진로가 확실했던 그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보니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이 되고 사이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이곳 옥천을 찾은 것이 대단한 포부가 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9월,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우연히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이곳 옥천이라는 곳에서의 첫 시작이었다.
사실 이곳 옥천에서 얼마나 버티고, 얼마나 이 일을 하게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 올해로 벌써 17년. 이제 그에게 이곳 옥천은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던 시간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 옥천에서도,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볕이 좋은 어느 날 오후. 어김없이 바삐 움직이던 노인장애인복지관 이한경(39, 대전 서구) 사회복지사를 만나 사회복자사로서 살아온 그간의 이야기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 타인의 마음을 보다듬는 그들도 마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저도 사회복지사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자녀이자 한 가정의 아내, 엄마인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 한마디로 가슴에 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받은 상처로 인해 몇 날 며칠을 속앓이를 하다 결국은 시간이 약이 되어 무뎌지면 그 상처를 가슴에 묻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지난해 사회복지협의회가 사회복지 인식 개선을 위해 군민을 대상으로 제1회 사회복지 공모전을 개최했다.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이한경 사회복지사의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되고싶습니다>가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꾸밈 없이 적어서 낸 이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고 상을 받게 될지 몰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노력을 해온 베테랑인 그에게도 여전히 감내하기 힘든 일이 있다면 바로 ‘감정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감정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통제하고 이를 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요구되는 형태의 노동을 뜻한다. 하루에도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 역시 감정노동이라는 족쇠가 그들의 마음을 옭아맨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내가 이렇게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이번 공모전에 참여를 했어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주제더라고요. 그래서 길게 고민을 하지 않고 글을 썼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적어낸 글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그 안에서 언어 순환을 많이 했지만 말이에요.”
■ 그들의 마음은 단단한 무쇠가 아니다
어느 날 아침. 복지관 개관 기념일 행사 준비를 하던 중 밑반찬 배달을 위한 차량을 위한 공간에 차량 한 대가 들어오더랬다. 당연히 찾아가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밑반찬 배달을 하러 오셨다면 세우셔도 괜찮은데, 그게 아니시라면 죄송하지만 배달을 해야 하는 차량을 위해 이동 주차를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나이가 몇 살이야?’, ‘니가 팀장이면 다야?’ 등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다. 따갑게 들려오는 소리와 큰 욕설에 무어라 대꾸를 할 틈도 없다. 자초지종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떡하겠나. 그저 가슴에 삭히는 수밖에. 혹여나 그러지 못한다면 주변 동료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서로 공감을 하며 보듬어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그 억울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한스러움이 눈에 고인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은 참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언제까지 살아가야할까?라는 생각이 들고,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이런 일을 경험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고 화도 나더라고요.”
가장 힘든 것은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홀로 참아내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도 조금만 더 들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는 그들 역시 그 마음이 무쇠처럼 단단하지는 않다.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다. 다만, 이러한 상황들을 참아내는 것뿐이다. 자신을 돌보기 이전에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 그래도 나는 사회복지사이고 싶다
그는 말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이 여전히 자랑스럽다고 말이다. 23살에 처음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한 순간이 더욱 많았다. 그 당시 처음으로 맡았던 ‘청소년방학교실’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말했다. “당시에는 저도 많이 어렸지만 나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따라주는 게 참 보기가 좋았어요. 말 안 듣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여린 모습을 또 보여주니, 그때가 정말 기억에 많이 남네요. 그 당시에는 장애아동들과 비장애아동들을 함께 수업을 했었어요, 같이 수업을 하고, 체험학습도 했던 것이 지금도 종종 떠올라요.”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이라면 복지관 내에 다양한 사업들이 많은데 오랜 시간 노인 사업에 몸담았던 시기다. 그 과정에서 어르신들이 나를 알아봐 주며 반가워해주면 그보다 보람찰 수 없었다. 그리고 간간이 건네는 어르신들의 커피 한 잔과 그 안에서 오가는 여러 이야기들이 현재의 삶에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이다.
“사실 어르신들은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큰 감동을 받으세요. ‘아버님 오늘 이발하셨네요?’, ‘어머님 오늘 파마가 너무 잘 되셨다’ 등 사소한 관심을 원하세요.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불러주면 참 좋아하세요. 사실 별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가 뵙는 어르신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것 같아요. 힘든 순간들이 여럿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일이 참 좋아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라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그는 자신의 자라온 환경과 성격을 생각해 보면 본인과 너무나 잘 맞는 일이라, 행복하다고 전하며 그 누구보다 일을 일로서만이 아닌 스스로의 행복과 성취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와 뜻을 전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인원 제한으로 복지관 내 프로그램에 원활히 참여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행복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를 대하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소한 배려가 필요하다 힘을 주어 말했다.
■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습니다
“사회복지사가 행복해야 이용자가 행복합니다.’행복한 일터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받는 사람이 행복한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습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할 때, 한 걸음만 물러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게 적었다.
행복한 사회복지사가 되는 방법은 따듯한 말 한마디와 사소한 배려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보다듬어야 하는 사회복지사란 직업이 자신을 갉아먹고 소진시키는 직업이라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나?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일터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는다. 물론 지금까지 그래왔듯 현재의 상황을 잘 이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가 소외 당하고 소진이 될 때 그들도 주저앉게 되는 순간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전에 그들을 위해 따듯한 손길과,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들이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존재보다 귀하고 사회복지사라는 직업 이전에 내 주변의 소중한 이웃이라 생각이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