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지금 나, 지는 석양이 아닌 붉은 노을
[은빛자서전] 지금 나, 지는 석양이 아닌 붉은 노을
옥천읍 문정리 오희숙 1942년
  • 김경희 시민기자 webmaster@okcheoni.com
  • 승인 2022.09.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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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이 극성일 때 어머니를 뵈었다. 능소화가 하나 둘 떨어져 내 발걸음에 밟힐까 사뿐히 내딛던 날에...그날은 염천임에도 절정의 가을날에 농익은 주황빛 과실을 맺어줄 감나무 잎도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능소화와 감 열매, 둘이 짝꿍이라는 건 주황빛깔의 따뜻함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예쁜 집 2층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여기에요”
어머니의 80년 인생, 듣지 않고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2층에 오르자마자 인사보다 탄성이 먼저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전망. 살아서 움직이는 나뭇잎들을 감싸 안은 짙은 녹음, 빈 운동장이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쟁쟁했다. 혼자 들떠서 “어머니 그림 같은 전망이에요” 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맞바람 치는 바람결에 더운지도 모른 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80년의 인생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휙 지나고 마음속으로 어머니 인생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아버렸다. 이 귀한 희로애락의 씨줄과 날줄이 엮인 인생사를 짧은 이야기로 만드는 건 나에게 고문이다.
행복한 고민이지만 인생 선배님이 들려주시는 주옥같은 이야기 몇 편만 담아본다. 아, 아쉬워라!

■ 수구초심, 고향으로 돌아온 9년차 옥천바라기

나는 삼양초등학교 10회 졸업생이다. 유년시절은 신기리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내내 살다가 9년 전 건강에 적신호가 오면서 인생의 말미라고 혼자 단정 짓고 옥천으로 내려왔다. 여러 가지 증상을 미루어 짐작하고 나만의 진단으로 암이라고 확정지었다.

그 생각에서 멈추자 아이들에게 짐이 되느니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먼저 천국 여행 티켓을 끊은 남편 곁으로 떠나겠다고 옥천으로 주소를 옮겼다. 그 후로 9년, 나의 진단은 오판이었으며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글도 쓰고 책도 내며 친구들과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유쾌한 결과물이다.

■ 유년 시절 기억의 터, 습쟁이 사목제 보겡 솔고개

해방 전에는 서대리 습쟁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어머니께서 딸 여덟은 낳았는데 언니 위로 둘, 밑으로 둘이 죽었다. 예쁜 짓을 할 때면 잃은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낳았고 남동생도 보았다. 금지옥엽같은 삼대독자 외아들을 낳았는데 몸이 허약했다. 지금 일봉장 앞이 읍사무소였고 건너편에 주중철 의원이 있었다.

병원 옆 일봉장 자리에 집이 나와서 타작하다말고 이사를 왔다. 집을 옮기며 좋은 일들이 있을까 했는데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도 시련은 많았다. 집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없듯이 우리 집도 어려운 고비를 하나씩 넘기는 중에 국수틀을 사서 공장을 했다. 손님도 많고 장사도 잘 되는데 6.25가 났다. 일곱 여덟 살 때쯤이었으니 갑자기 당한일이라 나는 그게 난리인지도 몰랐다. 피난길을 나서며 이사 가는 줄 알고 좋아라하며 떠났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사목제 넘어 보겡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려는데 사목제를 넘지 못하고 산 밑에서 하룻밤을 잤다. 여름이라서 이불을 안 가져 왔다고 엄마와 고모가 솔고개를 갔는데 군인들이 와서 모두 부산으로 가라고 산을 못 넘게 했다. 나는 겁이 나서 울고불고 보챘더니 산 넘어가면 개울이 있으니 건너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그 산 넘어 개울에는 피난민들이 이미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찾지도 못할 현장을 보니 무서워서 울며 헤매다 바위 위에 앉아 울고 있는데 친척 아주머니(이모할머니 며느리)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왜 혼자 있냐고 해서 이야기를 하고 아주머니를 따라가 3일 만에 가족을 다 만났다. 그때 아주머니를 못 만났다면 아마 고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고 그 분이 장에만 오시면 생명에 은인이라고 술 받아드리고 점심도 꼭 드렸다. 아주머니는 미리 피난을 가서 집을 얻어놓고 마중 나오신 것이다. 포화 속에 만난 은인이었다.

1.4후퇴 때 또 피난을 갔다. 6.25 때는 한여름 땡볕, 1.4후퇴는 살을 에는 겨울 추위에 피난길은 더더욱 고행길이었다. 매서운 추위로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데 미끄러질까 바르르 떨면서 겨우 건너고 다 왔다 싶은 곳에서 얼음이 녹아 있으면 그만 발이 빠져버려서 꽁꽁 얼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피난길이라 두렵고 너무 힘든 길이었다. 피난 갔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왔더니 우리 집은 피난민들이 차지하고 우리는 문간방에 기거하는 신세가 되었다.

보국대에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그들을 내보내고 우리는 다시 안방 차지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국수를 했다.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벌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봄 가정 실습 때 선배언니가 국수를 하러 와서 내가 언니를 도와주다가 내 손이 국수 빼는 로라에 끼어 손가락이 갈리고 말았다. 순간 내 비명소리를 시작으로 어머니는 고모한테 나를 병원 데리고 가라는 말씀만 겨우 하시고 기절하셨다. 나는 왼쪽 손가락 세 개가 부서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는 내 손가락을 보시면서 이 손으로 나중에 시집을 어떻게 갈까 큰 걱정을 하셨다. 국수틀은 내가 다치고 나서 팔아버렸다. 부모님은 국수틀만 봐도 오금이 저렸을 거다. 그 대신 기름틀을 들여와 기름을 짜기 시작했다. 그때는 손으로 힘을 들여 기름을 짜던 때라 우리 집은 기름 짜는 손님으로 늘 북적거렸다. 

부모님 사진과 내 결혼사진, 우리 두 아들과 함께

■ 할머니의 고통, 슬픔과 연민을 배우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가 되면 기름 짜는 손님들이 오기 시작해서 12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어머니는 하루 3시간 밖에 못자고 계속 일을 해야했다. 어머니께서 힘은 들었지만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던 때였다. 논도 사고 일본사람이 포도 농사를 짓던 땅을 사서 포도 농사를 했다. 어머니께서 기름집에 매달려 계셔서 살림은 전적으로 할머니가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가을이었다. 할머니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한 채로 김장거리를 다듬으셨다. 편찮으신데 워낙 바쁘니까 말씀을 못하시고 이모할머니께 말을 했다. 그때서야 병원에 가보니 자궁암 말기라 했다. 그때는 암이라는 것도 몰랐을 때다. 의사는 별다른 치료 없이 잡숫고 싶은 것 잡수시게 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의사의 진짜 의도를 모르실 수밖에 없어서 “소화제라도 주며 보내지 가서 먹고 싶은 것 먹고 가라”고 했다며 서운해 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 제삿날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희숙아, 너를 공부 못 가르치면 네 동생들로 그 아쉬움을 풀 수 있지만 할머니를 잘못 모시면 엄마가 평생 한이 되겠다. 미안하지만 포도밭집에 가서 조용히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감동되어 그날로 할머니를 모시고 포도밭으로 이사를 했다. 자궁암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몸속에서 고름이 섞여 나오는데 생선 썩은 냄새보다 더 심했다. 고모님도 오시면 할머니 방에 들어가는 건 엄두도 못 내고 문밖 마루 끝에서 할머니 얼굴만 보고 갔다.

청춘! 아름다워라

나도 처음에 할머니를 모시기 시작할 때는 냄새를 참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내 코에, 내 몸에 할머니 냄새가 배어서 역겨운 냄새보다 가여운 여인, 불쌍한 할머니 생각만 났다. 어느 새 기력도 쇠하시고 곡기도 끊으셔서 아랫집으로 모시고 갔다. 택시도 없고 자가용도 없어 리어카에 요를 깔고 누워 가시는데 그 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앓이를 해서 그만 나도 병이 나고 말았다. 어른들은 할머니보다 내가 먼저 죽을까봐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

할머니는 7월7석 날 저녁에 돌아가셨다. 나도 할머니 모시느라 몸에 진이 빠져서 문상 왔던 외사촌 오빠가 병원에 데려가 606호 주사를 한 병 맞혀 주었다. 그 즈음 항생제가 처음 나왔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 빈소에서 삼년을 모셨다. 

할머니 돌아가시는 시간과 함께 하면서 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 마음이 자라고 야무진 청년시절을 보냈다. 구멍가게도 열었는데 어린동생들이 줄줄이 사탕이라 과자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언제나 적자였다. 도둑도 많아 훔쳐가기도 했다.

지금처럼 cctv가 있기를 하나, 들어와서 슬쩍 가져가면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나이 들어 “그 때 과자 우리가 먹어치워서 남는 거 없었을 거야” 라고 웃으면서 그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구멍가게를 접고 신신 미장원을 했다. 나도 싹싹하고 미용사도 솜씨가 좋아서 손님은 많은데 자격증이 없어서 신고가 들어와서 애석하게 가게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두 손 들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어서 또 사업장을 열었다. 파리양장점을 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웨스트원형 뜨는 것을 배운 것이 고작이었지만 손재주가 있었나보다. 눈으로 보면서 따라하면 됐는데 양장점도 제법 재미있을 만큼 되었다. 겁이 없이 단체복도 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는 배짱도 있고 수완도 좋았다. 부모님의 영민함과 부지런한 성품을 물려받았던 모양이다.

학창시절 

■운명의 갈림길, 결혼

가게가 제법 잘되고 있는데 서울 사는 친척 동생이 장교로 임관되어 대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아버지한테 인사를 왔다. 아버지께서 “너 있는 부대에 남자가 많겠구나. 네 누나 백만 원 하는데 오십 만원만 받을 테니 총각 하나 데려와라”고 하셨다. 다음 주에 그 동생이 정말 ROTC 3기 중위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동생은 가교 역할만 하고 빠지고 형부가 동서감 선을 본다고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남편과 운명적인 만남,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대위 진급되어 예편을 해야 되는데 월남전이 장기화되면서 장교가 부족해서 예편이 미뤄졌다. 월남 패망 후 장교들이 속속 들어오는데 사고자, 무능자, 예편신청한자 순으로 예편을 시키니 남편은 때를 놓쳐 늦어졌고 직장 갖기가 어려웠다. 예비군 중대장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하게 되었다. 남편은 59세에 남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며 나는 아들 둘의 손을 잡고 인생길을 뚜벅뚜벅 걷게 되었다. 

■ 고향, 새로운 안식처

나는 지금 혼자다. 남편도 먼저 떠났고 아이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 이웃의 할매들이 우리 집에 모여 밥상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고 서로 든든한 벗이 되었다.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식보다 옆집 친구가 먼저 찾을 것이다. 

아침부터 전화벨 소리가 울리며 나를 찾는 이들이 있어 하루가 즐겁다. 혼자 있어서 얻은 덤 같은 일상들이 또 숨어 있었다. 그래서 인생은 옳다 그르다 규정할 일이 아니다.

그저 오늘 나는 나답게 살다가 잠들면 되고 다음날 눈을 뜨면 그저 감사하면 된다. 내 생명이 내 소관이 아닌 것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쓴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 다 놓아주고 나는 그저 나이기로 한다. 혼자서는 자유로워서 기쁘고, 둘이면 둘대로 즐겁고, 셋이면 셋대로 흐뭇한 그런 날들이 여러 날 모이면 어느 날 마지막이 올테지. 그러면 그날은 또 가볍게 이별을 하면 된다.

친구의 권유로 문학회도 들어서 글을 쓰고 그 글들을 모아 ‘붉은 노을에 쓰다’라는 제목의 책도 내게 됐다. 옥천신문의 실버기자단으로도 활동하면서 나의 이야기와 사색을 쓰고 있다. 언니도 가까이에 살고 있어 노년에 다시 찾은 내 고향 옥천은 나에게 새로운 안식처로 다가왔다. 

잡초도 키우면 꽃이듯이 작은 하루하루도 어여삐 보면 아름다운 날들이다. 나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배운 사람이다.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 너무 귀하다. 그래서 아껴서 잘 쓰고 싶다. 오늘은 소금을 볶아서 예쁜 병에 담아둬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오면 한 병씩 나누어 줘야지.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새벽녘에는 한기가 들어 이불을 끌어와 배위에 얹어야 한다. 아, 가을이 깊어 가는구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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