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한 줌, 바람 한 모금, 지저귀는 새 소리. 오랫동안 꿈꿔왔던 산촌. 조급함이 밀려왔던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시골 옥천에 머문 지 어느덧 12년. 자연이 주는 생동감에 처음부터 반했다. 공방 옆 이지당이 보물처럼 다가왔다. 내 발로 느리게 걷기,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시간. 들숨과 날숨은 점점 깊어져 간다. 내 안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흙을 만지고, 그림을 그리고, 색을 바르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과 면을 이어 입체의 세계에 침잠했다.
내 마음속 깊은 곳, 무엇이 있는지 모르며 지냈다. 아니, 애써 외면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가려졌던 그 속내를 옥천에 와서야 마주했다. 옥천은 바로 그런 곳. 처음에는 바깥 구경만 하다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기도 했다. 작업하고 바람 쐬기를 반복,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내면에 일어난 열정을 꽉 붙잡고 모든 걸 쏟아냈다. 하루가 참으로 짧구나. 온몸과 심혼을 담아 하나의 작품이 힘겹게 나온다. 고되지만 평온하다. 사람 손으로 빚은 작품은 같은 게 하나도 없다.
너도나도 행복을 바라며 산다. 사람들은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래”라고 이야기한다. 행복이 어디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할까? 끊임없는 언어의 유희가 아닌 진심의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예술은 자기표현을 하는 것. 어쩌면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을까, 우리만 모를 뿐. 그리하여 나도 당신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었다. “이곳에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래요”라고, 옥천에서 행복을 찾았듯이. 나의 옥천은 행복하다.
■ 실재와 상상이 넘나드는 이지당 풍경
지난 11월17일부터 27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김미경(57, 군북면 이백리) 도예가의 열 번째 개인전 <옥천유희II>가 열렸다. 전시 소제목은 ‘옥천에서 행복하길 바래’. 작품들은 산과 물의 풍경을 추상화한 백자 평면, 기물에 민화 형식의 꽃과 무더기를 그린 분청 입체 두 가지로 나뉘었다. 군북면 이백리에서 이지도예공방을 운영하는 김미경 씨는 옥천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오랜 작업을 거쳐 사람들을 만나는 이 시간이 휴식이나 다름없다.
“시아버님 고향이 군서면 사양리예요. 선산이 군서에 있어서 결혼하자마자 옥천에 왔죠. 남편 직장이 있던 서울에서도 지내고 대전에서 도예 공방도 했는데요. 다 정리하고 왔어요. 제 고향은 경북 포항인데요. 그전에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옥천에 지내면서 어느 순간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었죠. 나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겨났어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환경, 공간이 저를 달라지게 한 요인이 아닌가 싶어요.”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 이지당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많았다. 김미경 씨는 이지당 주변을 걸어 다니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이지당 앞 강가에 노니는 물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옥천의 또 다른 모습을 떠오르곤 했다.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관찰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길어졌다. 물고기, 어사화, 부귀영화의 의미가 담긴 모란까지 실재와 상상을 넘나드는 이지당 풍경 이모저모를 작품으로 승화했다.
■ 도예에 집중하며 신앙심은 더 깊어졌다
대학교에서 도자기기술학과를 전공하는 등 20년 이상 도예에 몰두한 그 역시도 중간중간 깨지고, 갈라지는 시행착오가 늘 따라왔다. 어느 작품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어떤 유약을 쓸지, 이번에 녹색으로 할지, 따스한 발색을 가져갈지 정하는 일은 매번 어려웠다. 결이나 두께도 제각각. 유약과 불의 세기에 따라 우연의 효과를 기대야 할 때도 생겼다. 알면 알수록 변화무쌍한 도예 세계다. 이번 전시를 관람한 옥천미술협회 회장이자 압화 작가 이미자 씨가 전한 소감이다.
“여러 그림을 봤지만 정말 예쁘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은 작품도 보여요. 흙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저도 도예를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김미경 선생님이) 협회 회원이에요. 이번 개인전으로 우리 회원들을 모시는 장이 돼서 보람 있고 뿌듯하고 감회가 새롭네요.”
김미경 씨는 옥천성당을 다니고 있는 천주교 신자다. 세례명은 마크리나(MACRINA). 성당에 다닌 지 30년이 지났다. 이번에 전시한 십자가의 길(14처) 작품은 온전히 신앙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14가지 장면으로 표현한 것. 이 작품은 순천 예수회 주문을 받아 12월6일 축성식을 앞두고 순천으로 보냈다. 장장 8개월이 걸렸다. 도예를 하면 체력 소진도 되고 중간중간 고비도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신앙의 힘이 버팀목이 됐다.
“제가 옥천성당에 처음 왔을 때 김인국 신부님이 계셨는데요. 도움을 많이 주셨죠. 그분께서 옥천에 잘 적응할 수 있게끔 많이 도와주셨어요. 신부님이 건강하게 옥천에 정착했다고 표현해주시더라고요. 외지에서 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왔지만 신부님은 많은 분을 만나봤을 거잖아요. 되게 편안하게 잘 정착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옥천성당 부설 소화어린이집 김지은 원장은 7세 원생들을 데리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김미경 씨 개인전을 보러 왔다. 그는 이지도예공방에 찾아가 아이들과 흙을 만지고 그릇을 만들어 간 경험이 있어 작품들이 친숙하다고 말했다. 김지은 원장은 “이지당을 중심으로 옥천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며 “김미경 선생님 개인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아이들과 나누게 되어 기쁘다”며 소감을 전했다.
■ ‘옥천에 사는 모든 분이 행복하길 바래’
김미경 씨는 공방에만 머물지 않고 옥천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인지재활강사로 4년 그리고 복지관에서 도예강사로 2년째 활동 중이다. 매주 하루 2시간씩 어르신들과 도자기를 만드는 수업은 내년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도예 수업을 통해 어르신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처음엔 도예를 어렵게 느껴 부담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수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얻는다고.
“흙장난처럼 자유롭게 느낄 때 부담이 없으세요. 이지당을 주제로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얼마나 재미난지 몰라요. 꼭 굽지 않아도 돼요. 그 상태에서 머물 수도 있거든요. 소꿉놀이처럼 해보자고 말씀드리면 금세 마음이 풀어지고 편안해져요.”
남천나무를 좋아해 호를 ‘남천’이라 지었다. 그에게 도예는 일상이자 삶이다. 화려하거나 특별하진 않아도 평범함 속 비범함이 있다. 어릴 때부터 흙을 좋아라 했다. 냇가에 삐뚤고 깨어진 사금파리를 발견하면 귀하게 여겼다. 위에 음식을 올려놓곤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트였다. 유년시절 유난히 행복하고 따스했던 추억이 하나씩 있다. 그는 엄마가 옛날에 자주 사줬던 니트를 지금도 즐겨 사 입는다. 까슬하고 싫지만 니트를 자주 입게 된다. 내 안에 깃든 향수를 간직하며 산다. 옛날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옥천은 따스하면서도 밝고 희망적인 곳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살면서 주변 풍광이나 모든 게 다 좋잖아요. 마음도 순화되고요. 이번 전시 소제목처럼 ‘행복하길 바래’라고 말하고 싶어요. 옥천에 사는 동안 다들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해요. 저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 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는 못 하지만 항상 그런 마음을 자주 가져요. 모든 분이 잘 되길 바라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