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47] 동이면 학령1리
신마을탐방 [147] 동이면 학령1리
사통팔달의 교통요지, 학령1리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4.10.22 00:00
  • 호수 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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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령1리 최고령 한호분 할머니(94)가 수확한 콩을 다듬고 있다. 오른쪽은 며느리 강봉순(64)씨.

읍에서 옥천-영동방면 4번 국도를 따라 5분쯤 달리니 이원면의 입구 구음티고개가 나온다. 고개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적하리를 이루는 3개 마을 중 첫 마을인 학령1리. 포도가 주요작물인 학령1리는 20가구를 회원으로 둔 부릉개포도작목회(회장 전재원)가 있다. 신호를 받고 차를 왼쪽으로 돌려 학령1리로 들어섰다.

4번 국도에서 학령1리로 접어드는 길목이 바로 동이농공단지다. 농공단지가 이곳 학령1리에 들어 선 때가 1988년이니 벌써 15년 이상 마을의 얼굴 아닌 얼굴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이농공단지를 통과해 적하교를 건너 나오는 육거리에 차를 세웠다. 이곳이 학령1리의 실질적인 초입인 듯 마을자랑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동이면 제1의 교통·교육·공업·상업의 중심
‘우리마을은 동쪽으로 맑은 금강과 영산인 철봉산의 정기를 받아 따뜻하고 아늑한 곳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마을로서 약 350여년 전에 부릉개(붉은고개)에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래되어오며...(중략)...동이면 제1의 교통·교육·공업·상업의 중심지이다. 마을이 풍성하여 인심이 좋고 인재가 많이 나며 대대로 효자, 효부가 속출하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자랑비의 내용처럼 학령1리 마을자랑비가 서있는 학령1리 입구 적하천앞 육거리는 분주하게 오가는 차량들이 끊이지 않는다. 마을로 들어온 길은 이원으로 통하고, 마을자랑비 옆 사이 길은 세산리로 통한다.

면사무소를 지나 옥천읍으로 통하는 길은 반대편으로 금암리와 학령2리로 가는 길로 나뉘고 학령1리로 들어서는 길이 또 두 길이니. 모두 여섯 길이 만나는 가히 동이면 제1의 교통의 중심지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빈번하다. 학령1리는 자연스레 상권을 형성, 동이면 상업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한 것이다. 오토바이가게, 카센터, 정미소, 약방, 건강원, 그리고 여러 상점들이 늘어선 골목은 이곳이 동이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한눈에 짐작케 했다.

1971년 3월 개교한 동이중학교가 98년 학생수 부족을 이유로 폐교됨으로써 동이면 교육의 중심이라는 명예는 지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학령1리는 교통·공업·상업의 중심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모두 함께 잘살자고 ‘부평촌’
“학령1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뤄진 마을입니다. 윗마을은 부릉개(:붉은고개에서 온 말), 아랫마을은 부평촌이라고 불러요.”

마을 박상범 이장이 마을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학령1리의 원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릉개마을은 마을을 지나는 고개의 흙이 붉은 황토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박 이장을 따라 폐교가 된 동이중학교를 지나는 고개를 올랐지만 붉은색의 황토 흙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고개를 내려와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학령1리 노인회장 박하정(73)씨를 만났다.

“원 마을인 부릉개마을 아래로 아랫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마을을 지나는 지방도가 면도(面道)로 개통되고 적하천 변에 전기방앗간이 들어오면서부터였어요. 윗마을만큼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자 따로 마을 이름을 짓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57년엔가 내가 모두 평등하게 잘살자는 의미로 부평(富平)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아랫마을 이름이 되었네요.”

현재 부릉개와 부평촌에는 8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주민등록상 등록된 128세대 가운데 80세대를 제외한 가구는 동이농공단지와 사회복지시설 행복한집에 거주하는 주민이다.

“동이농공단지가 들어왔지만 사실 마을과는 별 교류가 없습니다. 주민 가운데 여섯 분 정도 단지 내 사업체에 취업한 아주머니들이 있지만, 그분들 외에는 한 마을에 있다 뿐이지 교류는 없어요. 마을행사가 있어도 농공단지에서 누구하나 관심 갖는 사람도 없고…. 요즘 경기가 어려운 것도 한 이유가 되겠죠.”

박 이장의 말에서 마을과 소통을 갖지 못하는 농공단지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낮은 산등성이가 포근히 감싼 ‘부릉개’
부평마을을 돌아본 뒤 부릉개마을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경주김씨 세거비와 김동시 구휼비가 과거 김씨 집성촌이었던 부릉개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오려는 듯 날이 궂은 데도 한 노부부가 고구마 수확에 열심이다.

“부릉개 사세요?”
“여기가 고향이여. 스물일곱에 옥천으로 나갔지.”

김문호(77)할아버지와 김종예(75)할머니 부부는 시간이 날 때 마다 고향땅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 부릉개를 찾는다.

“이원 넘어가는 고개에서 이 마을을 보면 낮은 산이 오목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거든. 그래서 오래전부터 어른들이 마을 위치가 참 좋다고 했어. 꼭 챙이(:키를 말하는 사투리)처럼 생긴 땅이라 할아버지들이 챙이혈이라고 불렀지.”
“아이고 고구마좀 담으면서 이야기를 하든지!”

묵묵히 캐낸 고구마를 담던 할머니가 이야기에 열중하는 할아버지를 타박한다.

“올라오다가 김동시 어르신 구휼비 봤어? 그 어른이 내 5대조 되는 분이여. 한때 마을에 심한 흉년이 왔는데 그 어른이 마을의 세금을 대신 다 내주셨다고 하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구휼비를 세웠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궂은 날씨에 집집마다 말리려고 내어 둔 볍씨를 걷는다고 바쁘다.

◆올 포도 작황 나빠, 내년 기대
차를 몰고 마을에서 육거리로 내려오는 길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역시 그렇다. 금암리, 학령2리에서 옥천읍으로 진행하는 차량과, 적하교를 지나 육거리로 들어서는 차량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커브가 급해 마을을 빠져 나가는 차량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이 구간과 관련해 박 이장도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선형개량공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릉개와 부평마을을 감싸고 있는 포도밭은 올 한해 농사를 마감하고 내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봄 냉해와 폭염으로 평년보다 평균 30%이상 생산량이 줄었습니다. 포도가격은 그대로인데 작황이 나빠 농가소득이 많이 줄었죠. 아무튼 내년 농사는 하늘이라도 도와줘야 올해 보다 나은 작황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내년 포도농사를 전망하며 부릉개포도작목회 전재원(59) 회장은 노령화된 작목회의 미래에 대한 염려로 말을 맺었다.

“FTA를 비롯해 외국농산물에 노출된 우리 농가가 살 길은 친환경 유기농재배 뿐이라고 다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노령화된 작목회가 기존의 영농기법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마을 포도작목회의 경우 11개 농가가 저농약인증을 받은 상태지만 작목회가 고령화의 장벽을 넘어 전회원이 완전무농약영농을 정착시킬 때 까지 극복해야할 일들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 의미를 깨닫고 문 열었어요''

▲ 장애인과 정상인이 가족으로 함께하는 따뜻한 복지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는 조영희 원장.
지난 98년, 폐교가 된 동이중학교자리에 둥지를 튼 미인가 노인·장애인 복지시설 ‘행복한 집’이 올해로 벌써 6년을 넘기고 있다. 봉사자들과 행복한집 식구들의 식사준비로 바쁜 조영희(51) 원장을 만났다.

“아시다시피 행복한집은 아직 정식인가를 받지 못한 시설이에요. 미인가시설이다 보니 가족이 있어도 환자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처럼 이런저런 이유들로 정식보호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혼자 살아가기 힘든 분들이 행복한집의 가족들이에요.”

언제나 세상의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는 조 원장은 정식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행복한집의 사정조차 도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복한집은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언제든, 어떤 사람이든 이곳을 찾을 수 있고 이곳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죠. 벽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단지 아직 정식인가를 받지 않은 시설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가지는 분들에겐 꼭 한번 행복한집을 찾아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네요.”

행복한집은 복지시설이 갖춰야할 자산이 부족한 상태다. 6년째 임대중인 동이중학교 폐교시설물을 정식으로 매입하거나 장기임대계약을 체결해 정식인가를 받지 못할 경우 2005년 7월 이후로는 시설이 문을 닫게 된다.
정식인가도 힘들 만큼 부족한 환경에서 행복한집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다.

“옥천에 오기 전에, 대전에서 의료법인을 설립해서 운영했었어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없도록 병원 문턱을 낮췄는데 결국 적자를 감당 못해 병원이 문을 닫고 말았죠. 당시 병원에서 보호하던 환자 가운데 보호자도 없이 오도 가도 못하던 환자들과 함께 제 고향인 옥천으로 들어왔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나니 행복이 무엇인지 알겠더군요. 그래서 이곳을 ‘행복한집’이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원장인 저나 이곳의 가족들 모두 정말 행복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진정한 행복을 알게 되었다는 조 원장은 함께 나눌 수 있는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봉사를 위해 시설을 찾을 때 물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이웃으로 이곳을 찾아 녹차 한 잔 나누는 것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중요한 봉사거든요.”

장애인과 정상인이 가족으로 함께 하는 따뜻한 복지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는 조 원장은 학령1리 주민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처음 행복한집이 문을 열었을 땐 장애인시설이다 보니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동네 분들이 김장도 해주시고 맛난 음식도 자주 주고가시거든요. 항상 지역에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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