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 곳에 가면 마음이 확 트인다고 했다. 든든한 보호막처럼 자신을 감싸주고, 언제고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채우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었다. ‘고향사람’을 취재하면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말들도 그리 싫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아직 남아있는 어릴 적 순수함과 흙에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아름다운 본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향을 이제 멀리 떠나왔지만, 아직 그 앞으로 남겨진 땅이 그를 멀리서 부르고 있었다. 이원면 백지리의 텃밭 300평, 그것은 그에게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고향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것은 언젠가 다시 돌아갈 거라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였다.
그 땅은 찌든 일상속의 쉼터였다. 거칠게 몰아치는 삶에 지쳐버려 잠시 여유를 갖고 싶을 때, 그는 멋지게 펼쳐진 자신만의 땅에 아름다운 집을 짓곤 했다. 다시 갈 거라고, 돌아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그 속마음이 잔잔히 느껴졌다.
난 젊은이들과 함께 사오
그는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 남들은 지긋지긋한 그 학교를 25년째 다니고 있으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전성우(52)씨는 대전대 입학홍보처 홍보실장이다. 모든 대학의 일이 그의 입을 통해 나간다. 그런 그에게 대학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를 주문했다.
지탄초등학교 17회, 옥천중 17회 졸업, 대전상고, 대전실업전문학교, 청주대 편입, 청주대 지역사회개발대학원 국토개발 전공. 먼저 그의 간단한 인생 역정을 물었다. ‘17’이라는 숫자는 그에게 고향의 숫자였다. 옥천중 17회 동기모임인 ‘금강회’에서 총무를 맡으면서 매달 17일 고향친구들을 만난다. 지탄초 17회 동기들은 분기별로 모임을 갖는다. 20여 년 동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금강회의 응집력은 대단한가 보다.
“친구들 만나면 일상의 템포를 반 박자 늦추고, 고향 이야기도 하면서 우리가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같이 논의도 해요.”
옥천기업인협회 이규완 회장이 그의 동기이고, 농협에 있는 김용현, 장경우씨도 그의 절친한 친구다. 그는 군 제대를 하고 대학 행정을 맡은 지 25년이 되어 간다.
80년 청주대에서 교무업무를 보며 시작한 대학 행정은 87년 대전대로 옮기면서 계속됐다. 대전대 경영행정대학원 서무과장, 대전대 교무과장, 학생과장, 입학과장 등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작년 3월에 홍보실장 일을 하고 있다.
‘25’라는 숫자는 그가 현재 일하는 대전대와 맥을 같이 한다. 대전대의 개교기념일이 80년 3월1일인 것처럼, 그의 제2의 대학시절이 시작한 것도 그와 같다. 대학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니 젊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젊어보였다.
옥천 학생들 언제든 오시오
“제가 대학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옥천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얼마나 오는지 관심이 많아요. 옥천고에서 해마다 60-70명 정도가 오는 것 같아요. 충북과학대를 빼고 옥천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이 대전대 아니겠어요? 학생들 많이 오면 재전 향우회 통해서 장학금도 많이 주고 싶고, 좀 챙겨주고 싶네요.”
고향 선배로서의 마음일 것이다.
“예전에는 대전대 옥천고 모임에 더러 가서 막걸리 값이라도 내주고 그랬는데, 요즘엔 소식이 감감하네요. 그런 모임 불러주면 고향선배로서 고맙게 할 일을 찾아봐야죠.”
얘기가 조금씩 진전되다 보니 대전대와 옥천군의 자매결연까지 나갔다. 먼저 말문을 여니 그가 적극 동조한다.
“아! 그거 참 좋네요. 대전대와 옥천군은 더더욱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서로 도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아요. 옥천에 있는 모범 학생 뽑아서 대전대 입학하는데 가산점을 줄 수도 있고, 대학생들 옥천에 자원봉사활동도 활발하게 보낼 수 있고, 산학연 협력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잊지 않으려고 수첩에 메모를 한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고향에 도움이 될 것이 무엇인가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출향인들의 작은 마음들이 모여서 옥천이 조금씩 아름다운 고장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