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212] 군북면 보오리
신마을탐방 [212] 군북면 보오리
세월의 정감어린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은 삶터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7.01.18 18:07
  • 호수 8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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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에 모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은 주민들. 사진왼쪽부터 정갑순, 박정숙, 최마님, 최흥수, 이상예씨.
관성동호회에서 1984년 편찬한 옥천향지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보오리의 관할은 환평리였다. 지파실의 지와 보오리의 오를 합해 만든 지오리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것은 1914년이었다. 지파실과 마작골 양지말, 음지말 등이 포함되어 있는 용목리와 보오리 두 마을에 이장이 따로 선출된 것도 최근 일이다.

면적이나 주민수로 볼 때 용목이 더 큰 마을이다. 용목의 이장이 보오리까지 관할했다. 하지만 이장을 따로 둘 필요가 충분하다는 것은 현장에 가보면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두 마을의 생활영역은 분명 독립되어 있고 동떨어지기까지 했다.

보오리에 들어가는 길은 두 곳이다. 4호 국도를 따라가다 옥각리 혹은 각신리를 지나 들어가는 길과 37호 국도를 따라 보은방면으로 가다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대청호 물이 조금만 불어도 각신리로 이어지는 도로에 물이 넘쳐 다닐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도로를 높여 새롭게 포장했다. 동네 초입 공터에 차를 세워두고 보오리 마을을 쳐다보았다. 

몇 년 전 찾았을 때와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똑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 그것은 단지 동네 군데군데 빨갛고 하얀 집들이 새로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용한 아침, 골목을 따라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에 그 이유를 알았다. 마을도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데는 동네 곳곳에 옹이처럼 박힌 빈집들도 한몫했다.

▲ 낡은 지게 위에 얹힌 멍석이 세월을 느끼게 해준다.
땀띠에 효험 있던 ‘찬샘’ 
마을은 조그맣고 평온하다. 마을에 세워놓은 마을자랑비에 따르면 마을은 이미 500년 전에 형성되었다. 복골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르는 마을에는 경주 김씨가 터를 잡고 지금껏 살고 있다. 이외에도 유씨와 이씨, 석씨 등이 살고 있으며 옥천군수를 지낸 석상태 전 군수도 이곳 출신이다. 한 때는 50호 가까이 되었으나 지금은 30여 호가 채 안 된다. 

마을은 진입방향을 제외하고는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골짜기는 꽤 깊다. 그렇다보니 골짜기를 칭하는 이름도 참 많다. 마을 왼쪽부터 적어보면 학산터굴, 진너머, 큰터굴, 찬샘굴, 때빵굴, 성굴, 늘티미티, 장고개, 과배기, 명지굴 등이다. 

대부분의 골짜기에는 농토가 있다. 그러니 주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중에 위에서 말한 지명들이 심심찮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고유지명이 주민들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명중에 몇몇은 그 작명이유를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 굴은 골짜기를 가리킨다. 

학산터굴은 학모양을 닮은 산에 있는 골짜기고 찬샘굴은 샘이 있는 골짜기다. 성굴은 삼국시대 성인 할미성이 있던 곳이다. 그 중 찬샘은 동네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에도 소문이 났던 좋은 샘터였다.

“혼자 올라가서 가만히 있으면 무서울 정도로 소리도 힘찼지. 방구(바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쿵- 쿵-’ 하고 들렸다니까.” 

그 물은 땀띠에 아주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주민들조차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옛날 쌍가마가 그 찬샘으로 올라갈 정도였다고 한다. 부잣집 규수들도 찾을 정도로 영험한 샘이었다는 증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용하지 않으면서 낙엽만 수북이 쌓이고 수량도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 수형이 아름다웠던 은행나무는 강풍에 가지가 꺾여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대청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여전 
대청호에 물이 찰랑찰랑 차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전 이야기지만 그에 따른 주민들의 안타까움은 세월이 흘러도 옅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존과 직결되는 작물 작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그도 그럴 것이다. 

큰터굴이라 불리는 곳에는 한 때 감나무가 가득했다. 복골의 단감나무는 맛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대청호가 생기면서 감나무 소출이 뚝뚝 떨어지고 없었던 벌레까지 기승을 부려 호박, 콩도 제대로 수확할 수가 없다. 이제는 집집마다 마당에 심어 놓은 감나무 몇 그루가 가지를 벌리고 있을 뿐 대규모 감나무 단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니 대부분의 가정은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아무래도 안개 때문인 거 같여. 지난해는 벼농사도 힘들었다니께.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병이 생겨서 이장이 벼 모가지를 꺾어가지고 농약사에 가봤는데 약도 없다고 했댜. 큰일이여 큰일. 이러니 젊은 사람들이 살 수가 있겄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이 마을 최고령 주민인 이상예(86) 할머니가 경로당으로 들어선다. 군북면 자모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가마를 타고 군북면 이백리를 지나 고리산을 타고 복골에 시집을 왔다. 이제 복골에 터를 잡고 산지 칠십 년이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하늘만 들여다보였어. 길도 다 오솔길이었고. 새마을사업하면서 그나마 이렇게 동네 길이 넓어진 거지. 우리 집 뒤가 전부 대나무 숲이었는데 밤에는 무서워서 혼자 물 뜨러 못 나갔다니까.” 

주민들의 시집왔던 때 이야기는 아이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정갑순(74) 할머니의 팔남매 이야기가 도화선이었다.

섭바탱이 마을과의 추억(?) 
그때는 집집마다 다 그만큼씩은 있었다. 조그만 동네가 아이들 때문에 늘 왁자지껄 했다. 아침이면 논둑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차편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 복골 아이들은 모두 걸어서 죽향초등학교나 옥천중학교까지 다녀야 했다. 

“애들 때문에 섭바탱이 주민들한테도 많이 불려 다녔었는데.” 

죽향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에 있는 섭바탱이에는 당시에 포도밭도 있었고 사과밭, 참외밭도 있었다고 한다. 늘 배가 고팠던 시절, 철없는 아이들의 손에 밭이 온전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 덕분에 술, 담배를 싸들고 가서 밭주인을 달래느라 고생도 했고 때로는 없는 돈 만들어 변상도 해 주어야 했다. 

복골 주민이라면 누구나 하나씩을 가지고 있는 섭바탱이 마을과의 추억(?)이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된다. 그 때 그 아이들이 이제는 모두 장성해 명절이면 동네를 꽉 채울 만큼 커버렸다. 

한바탕 웃으며 떠들다 마을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은행나무 곁으로 가보았다. 150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라는 은행나무는 마을에 두 그루가 있었다. 하나는 큰터굴에 있는데 관리가 소홀했는지 뻗어나가야 할 가지들이 싹둑싹둑 잘려 마른 전봇대 마냥 힘없이 서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을이 기대고 있는 둔덕 위에 서 있다. 

수형이 참 아름다웠는데 강풍에 가지가 이리저리 꺾이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때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줘 주민들이 많이 찾던 놀이터인데 이제 그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고 주민들은 아쉬워했다.

▲ 복골모습. 비싼 기름값 때문인지 나무를 때는 집이 많았다. 큰 통나무 장작이 쌓여 있다.
복골, 세월의 먼지 툭툭 털어냈으면 
돌아 나오는 길, 동네 골목 잘 보이는 곳에 호출택시 전화번호가 선명하게 인쇄돼 붙어 있다. 도로 사정은 좋아졌지만 교통편은 여전히 어렵다. 하루에 네 번씩 들어오는 버스는 방학이라 세 번으로 배차가 줄었다. 호출택시 번호가 동네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골목 안 오래된 지게에 얹혀 있는 둘둘 말린 멍석과 텅 비어 잡초가 대신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빈집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새로 지은 주택 몇 개로는 감출 수 없는 세월의 더께가 그렇게 마을 전체에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따뜻하고 친절한 주민들의 마음과 땀띠를 낫게 했던 찬샘, 삼국시대 역사를 간직한 성골 등이 오랫동안 보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명지굴을 지나 장고개를 넘었다.

▲ 군북면 보오리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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