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옥천현대사 - 50년 묵은 토지..
발굴 옥천현대사 - 50년 묵은 토지..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0.09.30 00:00
  • 호수 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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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3년 7월 청와대 민원실과 군수를 상대로 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이 진정서에는 청성면 능월리 이해준(65)씨를 비롯한 5명의 경작자들이 수십년 전에 잃었던 경작권을 되찾아 달라는, 농민들의 한이 서려 있다.

이 진정서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해방 후 정부의 토지개혁에 따라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대지주였던 고 육종관(육영수 여사, 육인수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씨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유상분배받았고 토지가격을 5년간 상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 다툼에 휘말려 다시 토지를 잃게 되어 소작인으로 떨어지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재판 진행 과정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강권에 의해 토지를 잃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농지개혁법 시행부터 재판으로 토지를 잃기까지

평생 처음으로 토지를 가졌던 기쁨을 맛보았던아버지 세대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토지개혁이 시행된다. 남한에서는 지주에게 3정보까지만 토지 소유를 허용하고(단 종중 명의의 위토-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토지는 1기당 600평까지 제외)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을 적용, 국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서 경작인들에게 되파는 과정을 거쳤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연수확량의 150%를 5년간 상환하도록 했다.

일제 때부터 지주인 육종관씨의 농경지를 소작했던 청성면 능월리 농민들도 그때 땅을 분배받게 되었고 5년이면 자기 땅이 된다는 기쁨 때문에 열심히 상환액을 갚았다. 그래서 일부는 1954년에, 일부는 1955년에 자기 땅이라는 등기문서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지주 측인 육종관씨의 재판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을 위한 준비는 이들 농민들이 상환액을 같는 도중인 1953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전쟁 중인 이 시기에 지주 측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와 소작인들을 협박하면서 백지에 도장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주 측의 협박에 못이겨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얘기다.

지주 측에서 도장을 찍으라는 요구의 근거는 정부가 토지분배를 시행한 토지가 선대로부터 내려온 위토(제사를 지내기 위해 관리하는 땅)라는 이유였다. 문제의 토지는 능월리 135-2 토지 등 10여 농가에 달한다.

나중에 재판 과정까지 간 농민들은 9농가 10필지였다. 지난 93년 정부와 군수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농민은 5농가. 이 토지는 육신영씨를 비롯해 육종관씨의 아들인 육인수씨 등 5∼6명 공동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지주 측의 요구를 거절하며 반발했다. 또 지주 측 사람들이 올 때면 마을을 피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 측은 당시 전쟁 상황에서 카빈총까지 메고 와서 위협하는가 하면 도장을 찍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두겠다는 협박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진정서를 제출한 주요 인사인 이해준씨나 최정환씨 등도 지주들의 협박 현장을 본 목격자다.

갖은 협박이 백지에 도장을 찍게 한 요인이다

특히 지주 측은 당시 능월리 사람들 가운데 인민군에 의해 징용된 의용군이 나온 가정들과 피난을 가지 않아 인민군의 부역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했다는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

`빨갱이'라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지주 측의 자식이나 가족 중에 의용군이 있는 갔던 가정이나 인민군 부역사실이 있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경찰서에 가두겠다는 위협은 순진한 농민들에게는 가장 큰 위협수단이었다.

이 백지에 찍은 도장은 지주 측이 1954년 청주지방법원에 `포기증서 확인청구소송'의 증거로 활용된다. 주민들은 백지에 도장을 찍었을 뿐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소송에서 청주지방법원은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주지법은 당시 농민들이 분배받았던 토지가 지주인 육씨 문중의 위토라 해도 농민들의 상환이 끝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며 경작자들이 얻은 분배권을 지주에게 반환했다 해도 분배권자인 국가에 반환했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경작자들이 1심에서 이기는 작은 기적을 낳았다. 1956년의 일.

1심 승소, 그러나 사기에 휘말려 2심에서..

그러나 이에 불복한 육씨 문중에서는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고등법원 계류 중에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1957년 항소한 원고 측인 육씨 문중과 피고 측인 경작자 사이에 느닷없는 화해가 성립된 것. 이때 원고 측의 변호사는 조진만씨. 경작인들의 대리인은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인 김상윤이라는 사람이었다.

김상윤씨는 마을에 살면서 글도 제대로 모르는 경작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대신 소송을 알아봐 준다며 경작인들로부터 도장을 받아갔고 그 도장은 화해조서를 작성하는데 사용되었다.

화해조서에는 이 토지를 육씨의 위토임을 확인하고 경작자 명의의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말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경작자들이 어렵게 분배받은 토지의 소유권을 지주에게 돌려주고 별도 협정에 의한 제수의 납부를 이행하지 않거나 기타 배신행위가 없는 한 토지의 소작권을 박탈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경작인들의 대리인으로 화해조서를 작성한 김상윤이라는 사람에 있다. 경작자들은 날벼락같은 화해 소식에 대응조차 못한 채 김씨가 마을에서 달아난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김씨는 변호사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대리인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는 화해조서가 그대로 인정되었다는 점을 경작인들은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다.

부당한 화해조서로 인해 땅 잃고 소작인으로

더구나 1심에서 승소한 경작인들이 화해를 통해 지주에게 토지 소유권을 되돌려 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터다. 이에 경작인들은 대리인의 자격을 문제삼아 사기라며 대법원에 `화해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1962년 대법원에서는 고등법원에서의 화해조서를 그대로 인정, 패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주 측의 변호를 맡아 고등법원에서 지주와 경작인들의 화해조서 작성을 이끌어냈던 조진만 변호사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후인 1961년 6월30일자로 제3대 대법원장으로 전격 임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진만씨는 이후 68년까지 3, 4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경작인들은 이처럼 지주 측의 변호사가 대법원장으로 발탁된 것에서 보듯이 절대권력의 힘 앞에 제 소리 한 번 낼 수 없는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확정 판결을 받고 땅을 잃었다는 주장이다.

경작인들은 또 자신들이 잃은 토지가 육씨 문중에서는 위토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종중토지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위토가 있는 상황에서 법에 규정된 대로 1기당 600평이 넘는 면적은 경작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경작인 토지 상환액은 왜 안돌려주나

경작인들은 육씨 문중이 일단 재판에서 승소한 점을 인정한다 해도 토지 분배를 받기 위해 국가에 상환했던 토지 상환액조차 여지껏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토지상환을 위해 고픈 배를 더욱 움켜쥐어야 했던 주민들의 아픔이 더욱 가중되는 현실이다.

이제 이 토지 분쟁 사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지도 38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도 경작인들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진정서란 이름으로 문을 두드려 보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 대를 잇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경작자들은 매년 소작료를 줄 때에 마음이 가장 아프다. 자신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년 소작료까지 내야 하는 현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작료를 낼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파요. 내 땅에 농사지어 소작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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