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중병에 걸려 식물인간 상태에서 임종이 가까운 사람이라도 귀가 들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호스피스 전문의가 나와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죽음을 앞둔 환자도 청력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병이 중해져서 죽음 직전에 이르러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도 못하는 혼수상태로 있으면 살아 있어도 숨을 거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환자 앞에서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자가 들으면 섭섭할 말도 예사로 하며 장례절차 같은 얘기까지 하면서 앞서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분들은 환자 앞에서 의견충돌을 일으키고 다투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예의도 아닐 뿐 더러 하려면 자리를 피해서 해야 된다. 그런 환자도 청력이 남아 있어서 들을 수 있다.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10여 년 전 이야기로 장인어른께서 작고하실 때의 일이다. 장인어른께서는 당뇨, 고혈압을 앓으시다가 나중엔 중풍 증세까지 오고 병환이 깊어져 한동안 자리보전을 하셨다. 그러다 병세가 아주 안 좋아져서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나중엔 식물상태로 되셨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일이 여러 날 되었다.
가족들이 병원으로 모였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어느 날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가족들이 다 모여 환자 앞에서 여러 얘기를 하다 누군가 장인어른께서 들으면 서운할 이야기를 했다. 물론 듣지 못하실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다. 아! 그런데 내가 장인어른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쪼르르 흐르는 게 아닌가! 내가 이야기를 하여 그걸 여러 사람이 보았다.
임종 직전의 환자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자식 손자들 이름도 불러보고 싶은데 혀가 굳어 꼬부라져서 되지는 않고, 눈동자마저도 움직여지지를 않는데 귀는 들리니 그냥 속으로 몸부림치면서 혼자 외롭게 가는 길이 죽음길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때 누가 섭섭한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마지막 가시는 분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임박한 분에게 가족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그냥 마음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라도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의 길은 아무도 동행을 못한다. 대신할 수도 없다. 한 평생을 같이 산 부부는 물론이고 아무리 사랑하던 연인도 그 길은 함께 손잡고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같이는 못가도 앞서거니 뒤에서 따라가거니 하며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같이 가는 게 똑 그 길이다. 태어나서 거기 가기 전까지의 기간을 늘일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도 찾아먹고, 그 기간을 늘이기 위하여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건강하게 늘여야 한다. 골골대면서 기간만 늘여 주변의 짐만 되려면 그 기간이 짧은 것만 못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죽음이란 것이다. 대통령했던 분도 죽고 세상에서 가장 돈 많던 이도 결국엔 죽는다. 누군 영원히 살고 누군 죽고, 돈 많은 사람은 안 죽고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은 죽는다면 얼마나 불공평 하겠는가. 돈 있고 잘사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한 것 같지만…. 그러나 어차피 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죽음만큼은 그래도 참 공정한 것이구나 하는 걸 느낀다.
부모님이 되든지 일가친척이 되든지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말고 행동 경솔하게 하지 말자. 그런 일을 앞두고 경솔한 행동을 하거나 들어서 서운할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치고 힘들었어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서 보내드려야 죄짓는 일이 아닐 듯싶다.
명절에 고향으로, 고향으로 향하는 게 단지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조상님께 정성껏 올리는 차례가 더 중요한 일일수도 있다. 하필 추석에 마음 무거울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하는 사소의 벌초, 한두 번하는 차례나 기제사도 귀찮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저작권자 © 옥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