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이 말 속에는 선거가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유력한 수단 혹은 적어도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훌륭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거를 잘 하면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상가 시에예스(1748~1836) 역시 '상업사회에서 시민들은 공공업무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여가시간을 누릴 수 없으며 이런 이유에서 공공업무를 위해 모든 시간을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부를 위탁하는 선거를 이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상 생활이 바쁜 현대인들은 선거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다.
반면 또다른 프랑스 사상가 루소(1712~1778)는 정반대의 명언을 남겼다. 루소는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뽑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고 일갈했다.
두 사상가의 첨예한 입장 차는 '선거'라는 형식이 '민주주의'라는 본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과 함께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우리는 흔히 현대 민주주의의 발원지로 고대 그리스를 꼽는다. 고대 그리스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꽃 피웠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지금처럼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였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그리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정, 입법, 사법 등 중요한 권력 기관의 대표자들을 선거가 아닌 추첨, 즉 제비뽑기로 뽑았다. 이른바, '추첨제 민주주의'다.
아테네 행정부를 구성했던 700명 가운데 600명 정도가 추첨을 통해 뽑혔다. 시민들의 대표 기구인 평의회 위원 500명 역시 추첨으로 선발했다. 사법부에 해당하는 헬리아스타이에 참여할 배심원 6천명 역시 추첨으로 뽑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선거라는 방식으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추첨제가 일반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같은 추첨제 민주주의 방식을 200년간 유지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엇 때문에 선거가 아닌 제비뽑기로 그들의 대표자를 선출했을까.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제비뽑기로 '운 좋게' 권력을 잡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리스인들도 바보가 아닌 마당에야 그런 생각을 당연히 했다. 추첨제 민주주의는 그에 대한 예방책을 충분히 세워뒀다. 600명을 뽑는 행정관을 예로 들어보면 이들의 임기는 1년이었다. 일생동안 다른 행정직에 임명될 수는 있었지만 동일한 직책을 두 번 이상 할 수는 없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연임은 불가능했다.
행정관은 민회와 법정의 감시를 받았고 임기가 끝나면 결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언제든 책임을 물어 탄핵할 수 있었다. 탄핵 후에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30세 이상의 시민이면 누구나 행정관이 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누구나 행정관을 불신임 할 수 있었다. 추첨을 통과하더라도 체납 경력은 없는지, 군복무는 마쳤는지 등 자격심사를 거쳤다.
이 같은 제도적 장치로 인해 그리스 시민들은 임기가 끝난 후에는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잘못했을 경우 탄핵은 물론,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행정관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제비뽑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행정관이 되고자 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추첨이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일상적으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선거에 대한 우리의 굳은 인식을 뒤짚어 볼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선거와 추첨 중에 무엇이 더 민주주의 본질에 가까운 것일까. 선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과정이 투명하고 여기서 선출된 사람이 집단을 이끌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 때 성립한다.
정당공천제 폐지를 둘러싼 막바지 진통이 한창인 요즘 추첨을 통해 가장 현명한 사람을 찾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당공천제가 정말 잘못된 후보들의 난립을 막고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최선의 수단일까. 지난 20여년 간 이어진 지방자치 경험이 그 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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