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百中)이란
백중(百中)이란
황법명 <백운사 주지>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01.09.01 00:00
  • 호수 5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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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은 음력 7월15일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인 목련존자가 어머니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봉행하여 오미 백과를 공양했다는 것에서 유래되어 우란분절이라고도 한다.

`우란분경'에 우란분절의 기원에 보면 목련존자(目蓮尊者)가 육신통을 얻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니 어머니가 아귀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어머니를 구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업이 너무 두터워 구할 수 없자 부처님께서 목련존자에게 수행승의 자자일(自恣日)인 7월15일 과거와 현재 7세의 부모를 위해 부처님과 스님들께 백가지 음식과 다섯가지 과일 등을 공양하면 돌아가신 어머니도 천계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했다.

목련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해서 아귀도에서 어머니를 구했는데 이것이 우란 분제의 시초이다. 우란분회(盂蘭盆會)는 범어로 "Ullambana"의 한자로서 처음에는 오람파나(烏藍婆拏)라고 표기했다가 나중에 우란(盂蘭)으로 파나(婆拏)는 그 뜻이 `분(盆, 항아리)'이므로 음훈을 빌려서 우란분회라 했는데 `거꾸로 매달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우란분경의 설화에 따라 우리나라에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나 고려때에는 7월15일 사찰에서 국가행사로 우란분회를 봉행했다. 여기에는 스님은 물론 일반 속인들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들의 영전에 받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나 조선조에 와서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그 명맥을 사찰에서만이 봉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우란분회때 백가지 음식과 과일, 꽃 등을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하여 백종(百種)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에서 7월에 논과 밭매기를 끝내고 호미를 씻어 두는 호미씻기를 하고 나면 농부들의 발뒷굼치가 하얗게 되어 백종이라 한다는 민간어원설도 있다. 특히 제주도에는 지금도 백중에 대한 근원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옛날 `차킷뱅' 뒤에는 한 목동이 살았다.

하루는 그가 바닷가에서 말과 소를 먹이고 있는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내려왔다. 웬일인가 싶어 가만히 보니 옥황상제는 바다를 향하여 "거북아"하고 불렀단다. 잠시후 거북이 바다위로 떠오르니 목동은 너무 신기하여 숨어서 보니 "오늘밤 석자 다섯치의 비를 내리게 하고, 풍우 대작케 하라"는 말을 남기고 옥황상제는 하늘로 올라갔단다.

목동이 생각하니 큰일이다. 석자 다섯치의 비와 폭풍이 몰아치면 홍수가 날 것은 물론이고, 가축과 곡식이 성할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목동은 언덕에 올라가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거북을 불렀다.

"아까는 깜박 잊어서 말을 잘못 했다. 비는 다섯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게 하지 말게 하라" 거북은 알았다는듯이 물속으로 사라졌는데 그날 저녁 목동의 말대로 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한편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굽어보니 자기 명령대로 되지 않았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는 칙사에게 목동을 잡아들이니 목동도 이런 벌을 예기치 못한 바가 아니나 옥황상제의 벌을 받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러한 목동의 지혜와 용기때문에 그 해에는 제주도 뿐만 아니라 근간이 다 대풍작이었다. 그가 죽은 날이면 농민들은 한결같이 제사를 지내어 그의 혼을 위로했다. 이 목동이 죽은 날이 7월14일이므로 지금도 제주의 한 지방에서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 목동의 이름이 백중(百中)이라 '백중일(百中日)'이란 어원설도 있다.

이 제주도의 백중은 농신이라 볼 수 있다. 백중은 고대의 농신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우란분회의 영향으로 민속적 의의를 상실하였는지는 더 고증이 필요하나 또한 신라때 가배(嘉俳)의 베짜기가 이날부터 시작되어 백종절(百種節)이라 했다는 것을 보아도 백중은 원래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아니었나 사료된다.

그래서 백중에는 옛날부터 서로 모여 즐겼다. 경주에서는 성찬을 차려가지고 산에 올라가 노래하며 춤추고 놀았으며, 충청도 지방에서는 노소를 막론하고 거리에 나가 마시며 즐겼으니 대체로 옛날의 백중은 즐기는 날로 지낸 듯하다.

현재도 7월이 되면 농촌에서는 밭매기와 논매기가 거의 끝나고 비교적 한가하여 세속에도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 하듯 어정거리며 지낸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일정한 날을 정하여 `호미씻기'라는 것을 하는 곳이 있다.

여름 농사가 거의 끝나면 논이나 밭을 매는 호미가 필요없게 되어 씻어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원도 지방에서도 써레를 씻어둔다고 해서 이를 `써레씻기'라고도 한다.

이 호미씻기를 하는 날은 집집마다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농악을 울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니 이를 전라도 지방에선 `농현'이라고도 한다.

또한 백중을 전후해서 서는 장은 백중장이라고도 한다. 이때에는 여러가지 놀이와 노름 등 흥겨운 행사가 벌어지는 난장이라 했다. 이 백중이 서면 주인은 머슴들에게 새옷 한 벌과 장에 나아가 먹고 쓰고 즐길 돈을 주니 이를 `백중돈'이라 한다.

이 백중돈은 농촌에서 머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장정과 아이들에게도 준다. 그러면 모두 새옷을 입고 장터로 나가 물건도 사고, 먹고 마시며 구경하고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이렇게 백중은 농부들과 머슴들의 명절이었음으로 이를 `머슴날'이라고도 하였다. 또 학설에는 백종일을 중원(中元)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도교의 하늘의 선관(仙官)이 1년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매기는데 그 시기를 `원(元)'이라 하며 그 첫번째가 정월보름을 상원이라 하고, 두번째는 7월15일을 중원(中元)이라 하며 세번째가 10월15일로 하원(下元)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시풍속의 백중은 백종 또는 망혼일이라 하는 것은 이날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고 위해 음식 등을 차렸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양나라 무제때 동태사(東泰寺)에서 우란분제를 지냈다고 하며 그후 당나라 초기에 크게 성행하다가 민간 세습으로 축소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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