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친일과 정지용 시 '異土(이토)'를 보는 관점 (2)
조선일보 친일과 정지용 시 '異土(이토)'를 보는 관점 (2)
김성장의 함께 읽는 정지용 27
  • 김성장 cbocd@dreamwiz.com
  • 승인 2001.04.07 00:00
  • 호수 5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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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에 대해서는 이미 옥천신문에 게재된 바 있어 생략하며 정지용의 시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친일 문제의 발단이 된 시와 함께 당대에 친일에 앞장 섰던 문인들의 행태를 살펴 보는 것으로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異土(이토)

낳아자란 곳 어디거나
묻힐데를 밀어나가쟈

꿈에서처럼 그립다 하랴
따로짖힌 고양이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제

피였다 꽃처럼 지고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곻아진 흙에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
시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기러기 한형제 높이줄을 마추고
햇살에 일곱식구 호미날을 세우쟈

《國民文學(국민문학)》 1941. 2.

<시어의 풀이와 현대표기>

▶이토(異土) : 타향. 타국
▶고양 : 고향(?)
▶설산 : 雪山. 눈 덮힌 산
▶적도직하 : 赤道直下. 적도 바로 아래
▶병선 : 兵船. 군용 배
▶이랑 : 밭을 갈아 놓았을 때 두둑과 고랑.
▶피였다 : 피었다.
▶곻아진 : 고와진
▶싸흠 : 싸움
▶시 : 씨
▶세우쟈 : 세우자.

<시어의 풀이와 현대표기>

▶정지용과 서정주의 차이
이 시는 정지용의 친일 논란을 불러온 작품입니다. 혐의를 품을만 하지요. 우선 이 시가 일제 말기의 친일문예종합지 《국민문학》에 게재되었다는 것이고 그 내용에 의혹이 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문학》은 1941년 11월에 창간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문단 전체를 통합·어용화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에 입각한 기관지로서 《국민문학》발행을 주도하였습니다. 주로 일본어로 된 작품을 실으면서 암흑기의 친일 문학행위를 대변하였지요. 이 작품은 1942년 2월 《국민문학》4호에 실렸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민족이 독립한다는 희망을 깡그리 잡아 먹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37년 행정기관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40년에는 조선어로 쓰인 모든 신문 잡지를 폐간하였고, 43년부터는 전조선민족이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강제했습니다.

《국민문학》이라는 잡지가 친일인물 최재서에 의해 발간되고 있었고 항일 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은 게재될 수 없는 체제였습니다. 친일의 자세를 보이든가 아니면 현실문제를 비판적으로 건드리지 않아야 작품이 실릴 수 있었다는 얘긴데 정지용이 이 잡지에 작품을 실었다는 사실이 우선 정지용을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저는 《국민문학》에 시를 실었다는 것으로 정지용을 친일의 범주에 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작품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 하는 것인데 시 또한 '친일이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난점이 있습니다. 서정주가 쓴 시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 됩니다.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매일신보》1944년 12월 9일자에 실린 서정주의 시 `松井伍長 頌歌(송정오장 송가)' 중간부분입니다. 역시 같은 문학인으로서 이광수나 모윤숙이 보인 친일 발언을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이번 입영하는 학도 지원병은 반드시 용장 군인이 되어 일찍 고구려 조상들이 수당 백만대병을 지리 밟아 버리듯이 미국과 영국을 두들겨 부술 것입니다.

지금 학병의 집집에 날리는 깃발이 바로 그 깃발입니다.…사람들아, 그들의 무운 장구를 빌고 총후의 봉공을 한층 더 힘쓰자. 증산에, 공출에, 방첩에, 정신진흥에.(이광수.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1944)'

`어머니 이 몸이 간들 아주 가오리까. 나의 넋은 죽음 위에 찬란히 피어 어머니 나라에 꽃을 피우기 원합니다. 산 그늘에나 깊은 바다 속에나 살과 뼈가 버리워지는 대로 내 넋은 내 나라의 하늘에 살리오니 어머니 나라에 복된 거름이 되오리다....대 아세아의 아들로 칼을 들고 나갑니다.(모윤숙.「내 어머니 한 말씀에-특별 지원병 어머니께」1943)

정지용이 만약 친일시를 써서 충성을 바치려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이광수나 서정주 모윤숙처럼 치달아 가려 했다면, 적어도 문학적 비유의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민족이 적도 아래 남양군도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시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시의 기본 항목이 그 전쟁에서 죽은 넋을 노래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제목 `異土(이토)'는 `타향 땅' 또는 `타국' 이라는 뜻입니니다. 여기서는 일제의 군인이 되어 싸우다 죽은 전쟁터 쯤으로 여기면 되겠지요.

다만 그 넋의 위로가 헛되어 죽어간 것에 대한 애도인지, 그 죽음의 가치를 일본 천황에 바치기 위한 것으로 노래한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그 질을 달리합니다.

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망설이는 시작 태도를 읽게 됩니다. 정지용은 가능한한 노골적인 어휘를 삼가고 있습니다. 불편한 심기가 그렇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제비도 설산을 넘고' 따위처럼 시적 의미가 분명치 않은 부분들도 있습니다.

`충성과 피로 아진 흙에'라는 부분과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라는 행은 대상에 대한 찬양보다는 보편적인 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정도의 어휘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를 `시(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고 아리송한 말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해석자가 서로 다르게 자기식으로 끌어당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은 `기러기의 줄맞추기'와 `호미들고 일하는 일곱식구'의 모습으로 끝나고 있는데 담긴 의도를 유추해내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죽은 사람의 혼을 위로하는 남은 가족들의 성실한 삶의 태도로 읽힌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문장을 써내려가는 정지용의 자세는 서정주 처럼 제국주의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아서 그 품에 안겨 몸을 팔아버린 모습, 열열히 일본제국주의를 찬앙하며 압잡이로 나선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지금까지 나온 친일 연구서 어디에서도 정지용을 친일파로 규정한바 없습니다. 《국민문학》의 안면있는 관계자가 정지용을 찾아와 작품 쓰기를 요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정지용은 마지 못해 한편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될 때까지 그는 작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았던 할말을 쏟아내듯 해방 이후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의 발언을 하게 되고 친일파에 대해 거부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민족해방 대의하에 친일파 잔당 한간(韓奸 : 당시의 한민당을 말함-인용자)이 고립하게 되었다. 철저히 고립시켜라"(정지용 전집 2. 산문. 365쪽 「남북 회담에 그치랴?」에서)

여기서 말하는 한간 즉 한민당은 `8·15 직후 친일경력 지주 기득권층 중심 조직의 정당(한메디지탈 백과사전)'을 말합니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온상이고 또 그들의 최후까지의 보루이었던 8·15 이전의 그들의 기구-이 기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타도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오.

혁명을 거부하고 친일 민반도(民叛徒) 숙청을 할 도리 있거던 하여 보소."(정지용 전집 2. 산문. 368쪽 「민족 반역자 숙청에 대하여」) 민반도란 민족 반역의 무리라는 얘깁니다. 친일파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올 수 있을까 판단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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